문화읽기

2010년 11월

행복전도사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

문화읽기 방선기 목사 _ 직장사역연구소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가 남편과 동반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아이러니를 느꼈을 것이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는 행복을 외치던 사람이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으니, 그의 이야기를 듣고 행복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허탈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행복전도사에게 일어난 불행
그러다가 그녀가 루프스 병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여러 번 시도했다는 것과 끝내는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동반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나 자신 역시 류머티즘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그 근방까지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는 육체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자살한 경우여서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사람이 가장 귀중한 생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고통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도 처음에는 고통에 대해서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고통이 심해지자 결국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욥 3:1) 죽음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화를 찾는 것보다 더 간절히 찾았다(욥 3:21).
고통이 심해지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피하고만 싶어진다. 그래서 죽음을 찾게 되는 것이다. 최윤희 씨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적어도 그런 고통은 경험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몸의 고통이 찾아오자 행복이 조금씩 멀어져 갔을 것이고, 급기야는 멀어져 간 행복을 찾기 위해서 죽음을 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가 취한 행동은 용납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하게 된 동기나 마음의 변화 과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욥
그러나 어쨌든 최윤희 씨는 인생을 불행하게 마감했다. 이에 비해 그보다 더 많은 고통을 당했던 욥은 그의 인생을 아주 행복하게 마감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욥은 평안할 때에 행복한 사람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와 귀가 있고, 자녀들이 많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욥을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기 때문이다(욥 1:1). 일반적으로 세상은 행복을 객관적인 조건에서 찾으려고 한다.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상황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살 때 누릴 수 있다.
욥은 엄청난 고통을 당할 때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가 당한 고통을 보고 친구들과 아내까지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고통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죽음까지 찾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욥 1:22). 그는 이 고통의 이면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단련 과정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행복했다. 이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나 삶을 적극적으로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행복의 뿌리는 하나님을 놓지 않는 데 있다.

 

진정한 행복, 주님과 친밀함 속에서 선택하는 삶
욥은 마지막까지 행복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때에 다시 풍부한 재물과 아리따운 자녀를 허락하셨다. 그가 나중에 받은 복이 처음 받은 복보다 더 많았다(욥 42:12). 그래서 그가 행복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 바른 대답은 “네” 그리고 “아니요”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가 진짜 행복한 사람인 것은 그 복을 누렸기 때문이라기보다 그 복을 그가 지금까지 자기를 정죄하고 괴롭혔던 친구들을 위해 빌어서 얻었기 때문이다(욥 42:10).
욥기 전체는 욥과 친구들과의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욥의 친구들은 불행하게 보이는 욥을 더 불행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런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욥은 진짜 행복한 사람이다.
요셉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가 고난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도 행복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가 진짜 행복한 것은 자기를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은 형들을 향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하면서 그들을 용서한 것 때문이다.
세상은 행복을 객관적인 조건이 만족될 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 역시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아이들이 잘 자라주는 것을 보고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행복의 근거를 그것에 두면 행복을 잃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주관적인 마음자세가 행복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비록 상황이 안 좋아도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아마도 행복을 전했던 최윤희 씨가 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온전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그분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진정한 행복은 욥처럼 하나님을 놓지 않고, 경외하며 사람들을 용서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크리스천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내가 선택하는 삶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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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기 목사는 국방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두란노 편집부장, 성도교회 교육 봉사를 거쳐 현재 이랜드 사목과 직장사역연구소 소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