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11년 10월

기독교, 디지로그적 감성을 꿈꾸다

문화읽기 박영근 대표_ 아담재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놓겠다고 눈꼬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을 바꾸고 말겠다고 매를 들었고 … 쉰에야 … 바뀌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뭘 들고 계세요?”
4만 6천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트위터 스타로 널리 알려진 조정민 목사의 메시지다. 140자로 작성된 이 짧은 메시지가 줄줄이 사탕처럼 계속 리트윗(자기 팔로워에게 다시 보내기) 되고 있으니 그 영향력의 범위는 결코 작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름난 방송기자 생활을 접고 2007년에야 목회를 시작한 조 목사는 “트위터는 짧은 설교이자 기존의 목회를 보완할 수 있는 훌륭한 통로”라고 정의한다. 주로 나쁜 소식을 전하던 기자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목사로 변신하는 데 트위터라는 디지털 기기가 벽을 허물고 마음을 여는 좋은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약점과 강점부터 알자
정감 넘치는, 때로는 깊이 생각하게 하는 아날로그 메시지를 트위터라는 디지털 기기에 실었다는 점에서 조 목사의 메시지는 디지로그의 전형이다. 디지털은 원래 ‘숫자’를 의미하고, 아날로그는 ‘흉내 내다’ 혹은 ‘비유하다’라는 뜻이다.
시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때 유행하던 디지털시계는 시간을 [6:34] 하는 식으로 숫자로 표시한다. 전통적인 시계는 시침과 분침이 마치 해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점에서 아날로그다. 주목해야 할 점은 디지털 시계의 경우는 6시 34분과 35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34분 다음에는 그냥 35분이다. 사이 혹은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시계의 경우는 다르다. 초침이 계속 문대고 지나가니까. 분절적인 디지털이 하나씩 뛰어오르는 계단이라면, 연속적인 아날로그는 부드럽게 이어주는 비탈길인 셈이다.
커뮤니케이션도 디지털과 아날로그 둘로 나눌 수 있다. 사이나 중간이 없는, 즉 똑똑 떨어지는 것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다. ‘맞다/ 틀리다’, ‘찬성/ 반대’, 혹은 ‘네 개 가운데 3번’ 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날로그는 사이와 중간이 있어 어느 하나로 똑똑 떨어지게 말할 수 없는 경우다.
이처럼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각각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골라 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디지털은 ‘정보의 전달과 재생’에 강하다.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디’라고 디지털로 전달해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디지털은 ‘인간의 감정과 창의력’ 부분에는 매우 약하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질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생각해 보라. 어떻게 대답하든 모두 놀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정은 “all or nothing” 식으로 똑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해야 할 때, 아날로그한 것도 문제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체크한 간호사에게 의사가 그 상태를 물을 땐 정확히 숫자로 대답해야 한다. “체온은?” “미적지근한데요”, “맥박은?” “어지간히 뛰어요” 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똑똑 떨어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다
창의력 부분을 살펴보기 위해,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산수 시간을 상상해 보자. 선생님께서 ‘5+4=?’라는 문제를 냈을 때는 답은 ‘9’ 하나뿐이다. 디지털인 셈이다. 그러나 “무엇과 무엇을 더하면 9가 되나?” 하는 식으로 바꾸어 물으면, 답이 여럿 나오는 아날로그가 된다. 학생들이 ‘5+4, 6+3, 7+2, 8+1’이라는 네 개의 답을 찾았을 때, 선생님의 계속되는 질문 “이 외에 또 없나요?” 선생님은 ‘5-6-7-8’과 ‘4-3-2-1’을 계속 짚어가며 “다음이 뭔지를 생각하세요”라고 한다.
한참 만에 ‘9+0’이 나온다. “잘했다”라는 칭찬 뒤에 이어지는 질문 “이 외에 또 없나요?” 그리고는 다시 ‘5-6-7-8-9’와 ‘4-3-2-1-0’을 짚어가며 “다음이 뭔지를 생각하세요.” 긴 침묵 뒤에 드디어 ‘10+(-1)’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 뒤에는 ‘11+(-2)’, ‘12+(-3)’ … 아이들은 신나게 답을 외치고 선생님은 칠판에 답을 적으며 수업을 끝낸다.
창의력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때만 길러지고 발휘되는 것이다. 모든 사항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세세히 지시해 놓고는 “창의적으로 일하라”고 채근해대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책망에 불과하다. 
오래 전 KBS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를 비교하며 소개하는 ‘생활 사투리’라는 코너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전라도에서는 ‘아따 거시기하요’라고 하는 반면 경상도에서는 ‘내 아를 낳아도’라는 식이다. ‘당신을 못 믿겠어요’는 ‘쪼까 껄쩍지근하네’라는 식이고, ‘나는 당신이 싫어요’는 ‘아따 잡것을 확’라는 식이다.
여기에서 경상도 사투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가운데 어느 쪽일까? 분명한 행동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디지털이다. 반면 전라도는 똑 떨어지는 행동보다는 해석의 여지가 큰 감정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아날로그하다. 경상도 쪽에서는 행정가나 법률가가 많이 나오고, 전라도 쪽에서는 예술가가 많이 배출되는 것도 이런 특징과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기술이 아니다.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냐’라는 것은 곧 ‘어떤 인생을 사느냐’라는 것과 직접 맞닿아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기독교, 디지로그에 적합한 문화를 만들자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이렇게 각각 그 쓰임새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디지털은 높이 평가하는 반면 아날로그는 ‘불분명하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것이 아날로그의 푸근함을 그리워하게 된 원인이다. 결국 이 둘을 하나로 묶는 디지로그는 “ ‘high tec’는 ‘high touch’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부시게 발전한 디지털 기술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할 우리 사명의 실현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시공간의 제약과 함께 말과 글, 그리고 그림의 전통적인 벽까지 허물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기술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디지털만으로는 안 된다. 기술에 아날로그의 강점을 접목하되, 상반된 특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창의적인 노력에 진지한 투자가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디지로그에 적합한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조정민 목사 외에도 혜민(慧敏) 스님, 고(高) 율리안나 수녀는 불교와 천주교의 대표적인 ‘트위터 스타’다. 우리는 이들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종교인을 대할 때 사람들이 느낄지 모를 마음의 문턱을 낮추려 애쓴다. 자기 종교색을 일부러 드러내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욕설 공격도 재치로 받아넘기고, 절대 ‘블록’(트윗 막기)이나 ‘언팔’(팔로잉 끊기)을 하지 않으며, 1대1 쪽지를 통한 신앙과 인생 상담에 적극적인 것도 공통점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메시지가 트위터에 뜬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박영근 대표는 연세대 철학과, 신문방송학과에서 공부하고, 미국 남미시시피주립대학에서 언론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한세대 신방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기업교육전문회사 아담재의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