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2011년 11월

자살예방을 위한 교회의 노력과 설교가 절실하다

문화읽기 조성돈 교수_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하루에 42명이 자살로 죽는다. 1년이면 1만 5566명이 자살로 죽는다. 요즘 초등학교 교실에 학생이 대략 30명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이틀에 초등학교 교실 3개가 없어지는 것이다. 육군 1개 사단이 보통 1만 명 정도 된다. 그러면 역시 2년이면 3개 사단이 없어지는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서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망 원인 4위, 자살
자살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10년 대한민국의 사망 원인 4위가 자살이다. 1위는 암, 2위는 뇌혈관질환, 3위는 심장질환, 그리고 4위가 자살이다. 그 뒤를 이어서 당뇨병, 폐렴, 호흡기질환, 간질환, 교통사고, 고혈압 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당뇨병보다도, 고혈압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자살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차를 몰고 다니다 보면 전광판에 어제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나타난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게 되는데, 이 교통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로 죽어간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교통사고는 중요한 사망 원인이었다. 2000년 교통사고는 사망 원인 4위였다. 그런데 국가가 나서서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현재 교통사고가 사망 원인 9위로 내려왔다. 이는 자살 역시 사회가 경각심을 가지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면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자살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면 자살도 줄일 수 있을까? 분명 줄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살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현재 사회에서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이해한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자살은 심약한 사람들이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연으로 인해서, 사업이나 가정의 실패로 인해서, 성적 비관 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여긴다. 좀 더 이해가 있는 사람은 우울증이라는 정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즉 정신이 허약한 사람이 삶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이해의 근본은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1년이면 대한민국 국민 1만 5566명이 죽어간다면, 자살은 이제 사회적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 국가가 나서서 자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신종플루로 인해서 전 국민이 공포에 떨었던 적이 있다. 당시 정부는 보건소를 통해서 신종플루 백신을 보급했다. 노인 분들이나 어린이들이 이 백신을 무료로 먼저 맞을 수 있도록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각종 공공장소에는 손 소독제가 비치되어서 사람들이 손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예방책이 발표되었고, 온 국민은 이 지침에 따라 몸을 조심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당시 신종플루로 죽은 사람은 정확한 수치를 알 수는 없지만 2백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자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고, 이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 이 사회가 좀 더 노력하고 관심을 기울인다면 많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 낼 수 있다. 특히 자살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조그만 노력에도 큰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률을 줄여나간 데서 그 결과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회는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자살예방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교리보다는 통설에 가까운 명제가 교회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으면 자살할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면 자살할까,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자살할까 하는 생각들이 ‘자살하면 지옥 간다’와 연결되면서 자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정죄하는 분위기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살예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서 어려움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여러 목회자들을 만나서 자살예방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많이들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교회에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꺼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자살예방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당신들이’ 하면 좋겠다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목회자들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년과 올해 목회사회학연구소에서는 자살예방학교를 주최했다. 다들 중요한 일을 한다고 말해줬지만 참가자들을 모집하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교회가 이렇게 이중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은 결국 자살이라는 주제가 주는 무거움과 교리적 논쟁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에 42명이 자살로 죽어가는데, 아직 교회는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만 이야기하고 있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살예방을 하는 입장에서는, 중세시대에 교인들의 고통을 돌아볼 생각은 안 하고 바늘 끝에 천사가 몇 명이 앉을 수 있을까를 논쟁하고 있는 한심한 신학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을 뿐이다. 생명의 공동체가 되는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일단 죽어가는 생명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자살예방 활동을 하면서 같이 활동하는 전문가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들은 교회에서 많은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교인들이 생명이 소중하다는 사실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각하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당부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해서 상담소를 운영해야 한다. 교회 내의 교인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도 개방할 수 있는 상담소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상담을 공부하고 실제적 사역에서 실습을 해본 인적 자원이 교회 안에 충분하다고 본다. 교회가 이들을 지원해서 상담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제안을 한다면 지역 상담소를 설치하는 것이다. 큰 교회들을 보면 자체적인 상담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담소에 교인들이 찾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 교회에서 계속 만나야 할 사람에게 상담을 받으면 후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우울증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설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그래서 제안하는 바는 지역에 상담소가 생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역시 그 인력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많은 신학대학과 상담사를 위한 교육과정에서 이미 많은 이들이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이 지역에서 상담소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지역의 몇 교회가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주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상담소를 지원하고 있고, 자매결연되어 있으니 상담이 필요하신 분은 그곳을 찾아가시라고 안내를 하면 성도들이 좀 더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자살의 위험에 있었던 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자살을 생각할 때 천주교의 고해성사가 그렇게 부럽더라는 것이다. 속을 털어놓으면 좀 위기를 넘기겠는데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교회의 담임목사에게도 죽겠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너무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위기를 경험하는 분들에게 상담소가 소개된다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교인들이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되어야 한다. 즉 자살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여 전문기관에 연결하는 일을 감당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 자살예방 활동은 여러 지방 차원의 자살예방센터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생명의전화와 같은 민간단체들의 활동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 자살의 위험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서기에는 자원이 너무 부족하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살의 위험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 연결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교회는 소그룹 조직이 잘 되어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조직이 있어서 교인들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평신도 조직을 잘 활용하여 서로를 돌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한 자매는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알아서 자살의 위험 가운데 있었는데, 그녀가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그를 끊임없이 찾아와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해준 한 권사님 덕분이었다. 이러한 돌봄에 이제 전문가들의 도움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효과적인 자살예방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교회가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소그룹 리더들을 교육시킨다면 자살예방의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살예방의 강력한 도구, 설교
이번에 목회사회학연구소에서는 기윤실의 도움으로 ‘한국 교회를 위한 자살예방 가이드북’을 제작했다. 이 안에는 자살에 대한 짧은 글과 ‘자살에 대한 설교지침’, ‘자살자를 위한 장례예식’ 그리고 ‘자살예방을 위한 참고가이드’를 실었다.
자살예방에 있어서 설교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도구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으로 인해서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모임에 나타나지도 않는다. 이들을 위해서 무슨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그러나 이들은 예배에는 참석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고 우울에 빠져 있지만, 귀는 열어 설교는 듣는 것이다. 이들은 죽어야 할 이유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최소한의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설교를 통해 생명의 이유를 제공해 준다면 머리를 들어 설교자를 쳐다볼 것이고, 이를 통해 삶의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자살예방의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설교는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는 죽음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베르테르효과’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언론에서 유명인의 자살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서 모방자살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매주 8백만의 기독교인들에게 전달되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이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언론보다도 그 효과가 훨씬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들이 자살에 대해서 잘못 이야기하면 그 효과 역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자살에 대한 설교지침’을 꼭 숙지하면 좋다. 예를 들어 유명인이 자살했을 때 목회자들이 쉽게 설교에 이를 인용하면서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자살을 쉽게 생각하게 하는 영향을 미친다. 또는 설교자가 자살한 사람들은 다 사탄에 사로잡혀서 지옥에 갔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유가족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유가족들은 자살위험순위 1위에 꼽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자극하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교회가 관심을 가지면 자살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분명 교회가 움직이면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떨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그렇기에 이 자살예방 활동을 교회에서 펼쳐나가고 있다. 가끔 절망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조성돈 교수는 독일 킬대학교 신학석사, 마르부르크대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교회 다니면서 그것도 몰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