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읽기 이의용 소장_ 교회문화연구소
풍금 시대에서 오케스트라 시대로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60년 전후 교회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았다. 지금처럼 주일에 여러 번 예배드리는 교회는 거의 없었다. 찬양대의 규모도 작았고, 악기도 풍금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풍금은 피아노로 서서히 바뀌었고, 전자오르간, 파이프 오르간, 오케스트라로 진화했다.
요즘엔 피아노 세대가 주류여서 반주할 사람이 넘쳐나고 서로 반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하지만, 당시에는 풍금은 있는데 칠 사람이 없는 교회도 적지 않았다. 찬양대원의 수도 적었고, 악보를 볼 줄 아는 이들이 없어 찬송가를 4부 합창으로 부르기도 힘들었다.
그 후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음악 전공자들이 지휘자와 반주자, 독창자로 활동하면서 찬양대는 크게 발전했다. 요즘 우리나라 교회 찬양대의 수준은 거의 세계적이다. 칸타타는 물론이고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연주하는 교회가 있을 정도다. ‘할렐루야’ 정도는 웬만한 교회는 다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는 영락교회였다. 당시 영락교회는 모든 부문에서 한국 교회의 모델이었다. 특히 찬양대가 그랬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곡가, 지휘자, 반주자, 독창자들이 이곳에 모여 우리나라 교회음악을 힘차게 견인했다.
심지어 주일에 찬양 듣기 위해 영락교회에 나가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과 같은 찬양대 운영 방법, 교회 내 찬양대의 위상은 영락교회가 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음악가들에게 사례비를 주는 제도도 여기에서 생겨났다.
쉬운 찬송가곡에서 어려운 ‘명곡’으로
중요한 건 곡이었다. 찬송가 책은 찬양대에 좋은 교과서였다. 합동 찬송가, 새 찬송가, 개편 찬송가, 통일 찬송가, 새 찬송가 등으로 변모해 오면서 국산 찬송가의 비율이 계속 늘어났다. 그러나 찬송가 판매를 둘러싼 이권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은 새로운 찬송을 계속 소개해 줬다. 찬송가에 수록된 곡을 이용하던 찬양대들이 규모가 커지고 수준이 향상되자, 그리고 교인들의 감상(?) 수준이 높아지자 새로운 곡 소위 ‘피스곡’을 찾게 됐다. 새로운 악보가 필요했다. 지난 호에도 소개했지만, 당시 인쇄방식은 등사였다. 이것이 활판인쇄로, 옵셋인쇄로 계속 발전해 왔다. 악보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나는 어느 교회를 가든지 악보만 보면 사정해서 얻어오거나 슬쩍해 오기도 했다. 아마도 악보 수집에 대한 열정이 내가 45년 이상 지휘를 해올 수 있는 자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당시 악원사, 비파사, 기독교음악사, 교회음악원, 미파사, 에덴문화사, 호산나음악사 같은 악보 출판사들은 각 교회 찬양대에 좋은 곡을 계속 보급해 줬다. 그러나 마스터 복사방식이 등장하고 복사기가 등장하면서 교회음악 출판사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지금도 그렇듯이 교회마다 한 권의 악보를 사서 그걸로 여러 장을 복사해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두툼한 악보집을 만들어 사용해 왔는데 사실 이는 명백한 불법이고 저작권 위반이기에 교회가 빨리 고쳐야 할 관습이다.
복음성가, CCM 유입으로 혼란스러워진 예배 음악
초창기 교회음악은 대부분 예배용이었지만, 쉬운 가사와 곡으로 된 복음성가(Gospel Song)가 교회 내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교회음악에 복음성가의 불을 지핀 건 온누리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두란노 경배와 찬양 등을 통해 복음성가는 교회 내에 빠르게 확산됐고, 기타나 드럼 같은 악기들이 예배당 강단에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어서 기독교 방송이 CCM을 보급하면서 교회 내에는 다양한 음악들이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복음성가나 CCM은 비신자들을 위한 노래들인데, 세속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예배음악과 자리 경쟁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덕규의 ‘가시나무’, 세계적으로 유행인 ‘You raise me up’처럼 노래방에서 불리는 CCM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반면 소위 ‘찬양팀’이 찬양대와 별도로 운영되고, 청년예배가 장년예배와 분리 운영되고, 고등부 찬양대를 찬양팀으로 대체하거나 심지어 장년 찬양대를 찬양팀으로 전환하는 교회가 늘어나면서, 장년 찬양대들이 위축되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현상이다.
한편, 당시 악보출판사들이나 찬양팀들이 소개하는 곡 중에는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는 가사들이 적지 않았다. 또 가사의 내용이 예배음악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찬양대들은 어설프게 편곡하고 번역한 곡들을 그냥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곡을 연주해야 잘하는 것으로 여기는 교인들의 평가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교회 찬양대들이 부르는 ‘명곡’들이 과연 예배음악으로서 적합한지 심의하는 기구를 만들면 좋겠다.
요즘엔 가사나 곡을 파워포인트로 화면에 비춰주고 있지만, 당시 어린이 예배에서는 ‘궤도’라는 것이 그 역할을 했다. 전지에 가사를 써서 두툼하게 묶어놓고 예배 시간에 그걸 넘겨가며 노래를 불렀다.
어른 찬송가에는 없는 어린이 찬송가들이 여름성경학교 때마다 각 교회에 계속 보급됐다. “철없이 장난하는…”, “맑은 하늘 울리는 종소리 속에…”, “고요한 동산에 올라가…” 이런 노래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라는 여름성경학교 교가는 50년이 훨씬 넘은 곡이다. 이런 곡을 담아 음반을 펴내면 중장년들이 어린 시절의 교회생활을 추억하기에 참 좋을 것 같다.
한국 교회는 말씀과 찬송이 부흥의 기초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찬송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찬송은 곡조가 있는 기도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아쉬움도 없지 않다. 찬양대 규모가 커지고, 악기들이 진화하고, 전문 음악인들의 몰려들면서 교회음악의 기술적인 수준은 거의 세계적이다. 그러나 찬양대의 노래 속에서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 찬양하고 싶은 마음, 감격의 눈물이 많이 사라지고 대신 자기의 실력을 드러내는 음악적이고 시각적인 기교만 넘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또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점점 예배자들을 의식한 ‘연주(쇼)’, 설교용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삐걱삐걱” 페달 밟는 소리가 드문드문 섞여 들리지만, 또 아마추어들이어서 음정과 박자가 잘 맞지 않았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그리고 눈물과 감격으로 겸손하게 부르던 옛날 추억의 찬송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요즘은 각 교회마다 전문 음악인이 포진한 찬양대와 오케스트라까지 등장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진은 사랑의교회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모습이다.
이의용 장로는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커뮤니케이션과 인생설계, 교수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교회문화연구소장,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면서 대학과 기업, 교회 등에서 강연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