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009년 06월

『새로운 교회가 온다』 이머징 처치가 던지는 도전

서평 박삼열 목사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의 『새로운 교회가 온다』 (IVP)

‘이머징 처치’에 대한 논의가 공개적으로 시작된 지는 10여 년 남짓하다. 1990년대 초부터 거론되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2000년의 어바나 선교 대회에서 ‘이머징(emerging) 문화’라는 주제가 토론되면서 공론화됐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간략한 역사에서 우리는 이머징에 관한 교회 안에서의 토론이 아직 그리 탄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받을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자 D. A. 카슨 박사도 자신의 책에서 상당히 치밀한 논증을 펼쳐가면서도 이머징 교회라는 개념의 불확실한 정체성과 다양한 의견들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이머징 교회’ 운동은 특히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고, 미국 사회 및 교회와의 발 빠른 연동에 걸려 있는 한국 교회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교회 바깥에서 일어나는 현상만 하더라도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을 뿐 아니라 더욱이 교회 자체의 현재 모습 때문에 이머징 교회 운동을 도외시할 수 없게 됐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절박한 현실과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내일을 향한 대안에 목말라 있기 때문이다. 차제에 이머징 교회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주장을 펼쳐나갈 뿐 아니라(따라서 이머징 교회 운동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름대로의 구체적인 대안까지를 꼼꼼하게 제시하려고 하는 『새로운 교회가 온다』를 만나는 것은 아주 시의적절하다.


파산한 ‘크리스텐덤’ 교회
“교회가 전복적인 선교적 운동체로서의 역할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이 시대는 누구도 교회에 대한 눈곱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 (이 시대의 청중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서구 교회의 철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 교회가 탈출구를 찾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기존 구조를 개혁하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런저런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p. 22~24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고 새로움을 이루어내는 것은 늘 현재에 대한 문제의식, 그것도 보다 철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문제의식을 넘어 보다 몰입적인 현재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새로움을 향한 운동성 있는 열정이 발현된다. 뭔가 문제 있다는 의식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라고 할까. 이런 인간 마음의 흐름과 반응은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지만 상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방금 인용한 말은 오히려 당연하다.
이 책이 출발점으로 삼는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교회의 사역 대상인 세상, 곧 청중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그런 세상 앞에 호소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현재의 교회에 대해 호된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출발한다. 저자들은 오늘의 교회를 “파산한 크리스텐덤”이라고 진단한다.


성육신적 교회론으로부터
이와 같은 현실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세 가지다. 첫째는 성육신적 교회론으로,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과 초대 교회가 성전 예배라는 개념에 완전히 혁명을 일으켰지만”(p. 138) 교회가 유지하지 못한 그 혁명을 회복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불신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 건물 안에 있지 말고 술집 “더 콕 앤 보틀”(p. 30)을 운영하는 선교사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지역과 철저히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영성으로, “모든 삶, 삶의 모든 국면, 모든 차원이 한 분 하나님 아래로 들어와 통합되어야 한다”(p. 233)는 것을 뜻한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저자들은 사변적 특성을 띤 헬라적 사고에 대비하여, 구체적이고 실제적 특정을 띠는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메시아적 영성의 기초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뒤죽박죽된 우리의 삶의 현실’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만나는 곳(p. 224)이며 “행위는 성례전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계시적”(p. 251)이라는 말로 풀이한다.
마지막은 사도적 리더십으로, 저자들이 말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인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실제적 전략이다. 비유컨대 날기를 포기한 길들여진 거위로 하여금 본성을 자극하여 날갯짓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크리스텐덤에 길들여진 지금의 비선교적이고 무기력한 교회로 하여금 이머징 교회 혹은 선교적 교회가 되게 하는 리더십이다.

 

지속적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를
조목조목 부인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이지만 일반화의 오류가 지나침을 간과할 수 없다. 또 일반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도 적지 않다. 특히 이 책의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논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 즉 사도 시대 이후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크리스텐덤’ 교회로 규정하는 것에 설득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미 어떤 논증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예컨대 저자들의 중요한 논거인 성육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개념은 이전 세대부터 논의되어 온 상황화의 연속성 속에 있고, 또 메시아적 영성 역시 교회가 오래 동안 고민해온 이슈일 뿐 아니라, 최근 상당한 논의의 발전을 이루고 있는 일상생활 사역 혹은 일터 사역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물론 이와 같은 논의에 생소한 독자라면 상대적으로 훨씬 새로울 수 있겠지만, 논의 중심에 새로운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따라서 예컨대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간과할 수 있을 정도의 ‘새로운 교회가 온다’고 보기에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로부터 외면당하는 뚜렷한 현실에서 지금과 미래의 한국 교회를 향한 저자의 열망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특히 새로운 교회가 왔고 와야 한다면서 특히 ‘성례가 되는 행동’을 말하는 저자들을 통해 로마서 12장 1~2절의 ‘산 제사’를 떠올리며 새로운 교회를 향해 각오하는 것은 독자의 기쁨일 수 있겠다 싶다.
더 나아가 오늘날 서구 교회의 위기 현상을 보다 실제적으로 아는 독자라면 이 책의 신랄한 평가가 도리어 양반답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보다 혹독한 평가를 받아도 할 말이 없어 보이는 교회의 현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 당장은 그 정도 아니라 할지라도 조금의 나중을 상상해보면 결코 덜한 비평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임은 기우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이 책이 말하는 ‘크리스텐덤’ 모습을 갖고 있다면 이머징 교회 운동은 코앞에 닥친 우리의 문제이기에 충분하다. 때문에 몹시 불편하더라도 이 책을 집어 들고 “현재 우리의 모습”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내일을 꿈꾸며 말이다.

 

박삼열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과와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두란노서원에서 발간하는 <목회와 신학>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사랑의교회 부목사로 사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