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저널

2008년 09월

사랑할 수 없었던 조원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해외저널 제시카 왓슨

<discipleship journal> 7·8월호

 

제시카 왓슨
소그룹인도자이며, 가정주부이자 작가이다. 그녀는 농구 코치인 남편보다 정확히 38cm가 작고, 듀크대학 블루데빌의 열광적 팬이다.

 

 

“제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남편이 물었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아침 식사 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최근 시작한 소그룹에 참석할 것 같은 예상 조원의 명단이 놓여 있었다. 이 소그룹의 목적은 아직 소그룹에 정착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그들이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나는 존(남편)이 제니에 대해 물었을 때, 내 마음이 침울해지고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니는 아직 소그룹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솔직히 그녀가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그 어떤 소그룹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반갑지 않은 조원 받아들이기
제니는 휠체어를 탄, 자세가 약간 왼쪽으로 기운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 출장 중에 강도를 맞았고,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 결과로 뇌손상을 입고, 다른 여러 합병증까지 갖게 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경험해 본 제니는 횡설수설하기가 일쑤고, 가끔은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녀가 우리 소그룹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과장되고 반복되는 기도제목과 그녀의 간증을 우리 소그룹의 조원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그녀를 우리 소그룹 안에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제니가 소그룹에 연결은 돼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녀는 말도 많이 반복하고, 가끔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존은 나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당신 이야기가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녀에게 영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냥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듣기에도 나는 그녀를 우리 소그룹에서 떼어 놓으려고 유치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존은 격려의 미소를 띠며 “만약 그것이 문제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 소그룹에서 겪었던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풀어 나갈 수 있을 거예요”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마음속 깊이 그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결국 제니는 우리 소그룹에 참석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다른 조원들이 그녀를 향해 많은 인내를 보여줬다. 나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랬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의 마음은 절대 그녀를 편안하고 반갑게 맞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참석하지 않은 모임 때면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그녀가 나타나는 저녁이면 마음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섬김의 면모
제니가 우리 소그룹에 참석한 지 몇 달 후, 나는 개인적으로 복음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셨는지에 대해 읽을 때마다 내가 제니를 향해 가졌던 마음자세에 대해 깊은 가책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됐다.
그리스도의 사역 중 세 가지의 부분이 나에게 크게 와 닿았다. 그것은 그의 포용성과 자기부인, 그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다. 이 세 가지 모습을 깊게 묵상하면서 제니를 향한 나의 마음가짐을 바꿀 수 있었고, 드디어 그녀를 우리 소그룹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환영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세 가지의 모습이 당신이 조원들을 환영하며 맞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나누고자 한다.

 

첫째, 차이는 좋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셨다.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사랑과 돌봄 밖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와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이들은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에 있어 특별한 수혜자였다. 복음서 구석구석마다 창녀와 나병환자, 버림받은 자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9:11).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흠 있는” 자들과 함께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해 경악했고 분노했다.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의 포용하는 사역의 또 다른 예를 보여준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물을 기르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신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여성들이 종교 사건에서 배제되었음은 물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심한 긴장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물을 달라 하자 여인 자신은 매우 놀랐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절)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행동에 매우 놀랐다. 27절에서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예수님의 사역은, 내가 내 소그룹에서 원했던 그림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무의식중에 나와 관심 분야가 같거나 같은 삶의 경험을 가진 이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제니는 나의 이러한 그림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계속 멀리 했던 것이다. 나의 이런 모습을 깨닫게 된 후,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와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며, 그녀가 좀 더 우리 모임에 깊이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하고 노력했다.

 

둘째, 나를 위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본 두 번째 모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필요보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먼저 두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비천한 출생에서부터 고통스러운 죽음까지 자기부인을 몸소 실천하셨다.
그는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셨다.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역을 위해 준비하셨다. 그는 그의 시간을 다 헌신하셨고, 머리 둘 곳조차 갖지 않으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도 내려놓으셨다.
예수님은 자기부인의 삶을 사셨을 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기대하신다. 복음서를 더욱 깊게 공부할수록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자기부인이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제니를 대하는 내 모습에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자기부인을 요구하심을 깨닫게 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제자들은 십자가가 고문의 도구이며, 그 결과는 고통스럽고 흉흉한 죽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완벽한 자기 항복을 요구하신것이다.
이러한 소명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글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돌봄으로써, 그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줌으로 우리 자신이 그들의 필요를 위해 헌신함으로 그들에게 자기부인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나는 내가 소그룹에 대해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견디기 힘든 상황에 빠지고 싶지 않았고, 창피를 당하거나 불편한 상황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나의 초점은 철저히 내 자신이 원했던 것들에 맞춰져 있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자기부인을 요구하셨고, 제니의 필요에 대해 생각하게 하셨다.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곳, 그녀의 짐을 나눌 수 있는 곳,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이 그녀에게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것을 보여주셨을 때, 난 제니를 위해 우리 모임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소그룹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녀의 기도제목에 대해 항상 확인하고, 그녀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격려했다. 그녀의 필요에 내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깨닫도록 도왔다.

 

셋째, 아버지를 의지하다
자기부인을 실천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이를 위해 내가 세 번째로 발견한 예수님의 사역 모습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셨다. 예수님 앞에 놓인 자기부인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용기, 은혜와 평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를 위한 시간을 자주 가지셨다. 누가복음 5장 16절은 예수께서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라고 기록한다. 또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는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시간에 대해 자주 접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셨던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가지셨던 특별한 교감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혹한 죽음의 현실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41~44).
이 본문에서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이신 아들께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신 아들께서 이렇게 그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쏟아놓음으로써, 십자가를 향하여 가기 위한 힘을 얻으셨다면, 난 내게 주어진 모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셨던 것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난 하나님께 특별히 제니가 우리 모임에 나오는 것을 원망하지 않게 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로 그녀에게 나아가기 위해 능력과 은혜를 주실 것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싫은 조원을 향한 나의 마음변화
제니가 우리 소그룹 모임에 참석한 몇 개월 동안 그녀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대화에 있어서 과장되게 말하고,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변했다. 그러한 변화는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우리 소그룹 안에 포용하고, 나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었을 때, 나와 제니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인한 나의 짜증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난주 했던 간증을 똑같이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그녀 옆에서 그녀와 함께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작은 업적이 아니다. 과거에는 불쾌함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그녀가 이야기를 그만하고, 다른 조원들과 더욱 중요한 일에 대해 토의하기를 원했던 나였다. 그런데 어느날 제니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을 때 나는 그녀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우리 소그룹과 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꾸어 놓으셨는지 생각하면서 깊게 감동받는다. 물론 내가 이 교훈을 완벽히 배우고 실천했다고 호언장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고자 하는 나의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번역: 주성현 전도사(국제제자훈련원 국제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