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추태화 교수_ 안양대학교
모든 사람은 고유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세계관(Worldview)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보다 근본적으로 세계관은 종교를 기반으로 형성돼 있다. 러시아 사상가 베르자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종교적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 통용되는 각기 다른 관습이나 가치관은 종교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부모와 자녀 관계를 소유 개념으로 본다. “아이고 내 새끼”라는 말은 아이가 사랑스럽다는 뜻이지만, ‘내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기독교 영향이 깊은 서양에서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다. 서양에서는 자식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한다. 자식은 부모를 통해 나오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기인한 것이므로, 그분의 계시에 따라 양육해야 한다는 의식이 뿌리내린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식에게 “왜 말을 안 들어!”라는 일방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서양에서는 자식에게 먼저 묻는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이는 자식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말이다.
죽음에 관한 개념도 동서양이 서로 다르다. 동양에서의 죽음은 대체로 무섭고 공포스럽다. 사자(死者)는 북망산이나 동네 밖에 묻는다. 무덤 지역은 출입이 두려운 곳으로 여겨진다. 반면 서양에서는 교회 뒤뜰에 공동묘지를 두기도 하고, 무덤이 동네 안에 있는 경우도 많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공동묘지는 명절 때 성묘를 위해 방문하지만, 서양에서는 산책도 하고, 조깅도 하는 친숙한 일상의 장소다. 왜 그럴까?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양적 세계관이 바라보는 죽음은 부정적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인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별세한 이들이 내세와 천국을 기다리며 안식을 취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묘지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불교, 유교, 도교, 샤머니즘 등이 뒤섞여 살아가는 종교 혼합주의 사회다. 여기에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하며 더불어 새로운 삶을 전했다. 이것을 문화 전파설에 의한 사회 변화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섭리 과정으로 봐야 정확하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찾아 부르신 것이다. 복음은 130여 년 전에 한국에 구원의 씨를 뿌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러 종교에 의한 세계관을 갖고 살아왔던 것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먼저 인간관계에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양반과 비양반,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되는 사회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혁신적인 기독교 사상이 대변혁을 가져왔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가히 세계관의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남녀노소의 차별이 명확하던 조선 시대의 가치관이 비로소 마감됐다.
영적 전쟁과 기독교 세계관
현대 사회에는 수많은 가치관이 난립하고 있다. 개인의 자아가 중심이 되고, 모든 것이 상대화돼 있다. 진리보다는 현실을, 고귀한 관념보다는 체험을 중시 여긴다. 즉흥적이라도 내 기분에 맞으면 선(善)으로 받아들인다.
쉐퍼(Francis A. Schaeffer)의 분석을 빌자면, 이는 절대 가치를 거부하고 절망선(the line of despair) 아래로 내려온 치명적 상처 때문이다. 절대 가치를 뒤로하고 황량한 거리에 나선 현대인들은 만족함이 없고, 끊임없이 비교한다. 상대적 빈곤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타자와의 화해보다, 타자를 지배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선악의 개념도 상대적이다. 악이 존재해야 선도 선으로 대접받는다는 이론을 갖는다.
이 같은 시각은 가룟 유다가 있었기에 예수가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과 다르지 않다. 가룟 유다 영웅론이 여기서 출발한다. 악을 선이 조금 부족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고, 거룩함과 세속의 사이도 불분명하다. 신성모독의 행동도 문화의 이름으로, 예술의 이름으로 환영받는다. 노이즈 마케팅이 이를 부추기기도 한다.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악인지 혼탁하다. 영적 전쟁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현대 사회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종교가 혼합돼 절대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불확정성이 만연해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를 자주 직면한다. 죽음도 일상에서 종종 만나는 대상이다. 어느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현대인들은 죽음을 향한 불안에 늘 직면해 있다. 죽음은 없음(無)의 다른 이름이다.
현대인들은 소멸을 삼키는 블랙홀에 잠식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대체물을 찾는다. 돈, 명예, 권력, 약물(술이나 마약), 인간관계, 신앙 등이 그것이다. 현대인의 실존을 달리 표현하자면 영적 혼돈 상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벧전 3:15)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 알려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어느 시대보다도 더 요구되는 이유다.
삶의 현장 속에 있어야 하는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점은 논리와 체계에만 있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삶 속에 녹아져 행동으로 나타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곧 기독교 문화가 변증론에 가장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는 문화적 변증론(Cultural apologetics)이야말로 현대에 요구되는 기독교 변증론이라 확증한다. 삶 자체에 배어 있는 신앙적 행동이 말보다 효과 있는 변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생활하면서 세계관을 표출한다. 왜냐하면 가치와 의미의 세계가 삶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어떤 생명이라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고귀한 피조물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어떠한가.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 살인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을 가진 사람도 물건 취급한다. 상품화가 극단적 사례다. 사람이 상품화가 된 것이다. 가장 극명한 예가 연예인들이다. 연예인들은 인기라는 고부가 가치를 명목으로 돈을 벌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기획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신적 존재도 상품으로 만들어 내 맘대로 조종하려 한다. 신이 하나의 액세서리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압축적으로 들어 있다. 이웃 사랑을 입으로만 한다면 이는 복음에 배치된다.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실천한다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선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이론과 말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행하느냐가 중요하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마 7:21) 것이 우선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 속에 녹아서 실천 방안으로 정립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하는 바다.
근신하고 고뇌하는 세계관을 견지해야
기독교가 인류 역사 속에서 부정적으로 비친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비기독교인들을 억압한 것이 일례다. 진리의 편에 서서 악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권력이 오히려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믿는 자라 해도 지상에서는 완전한 의인은 아니기에 우리는 죄성을 항상 살펴야 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근신하는 세계관은 지배적이며 완력적으로 보이는 강성 세계관보다 훨씬 여유롭고 관용적이다. 강한 것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격파해 이기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방을 포용하고 설득함으로 이기는 방법도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여러 가지 전략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기독교 세계관은 고뇌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행 17:11). 정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답에 다가가는 다양한 길을 고민하는 진지한 자세,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또 다른 자세가 아닐까 싶다. 정답을 달달 외우는 똑 부러진 신앙인보다는, 진리에 대해 고뇌하며 말씀 안에 거하고자 하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더 귀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는 기독교 세계관, 세상이 감당치 못할 기독교 세계관을 분명 우리에게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