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 추태화 교수_ 안양대학교
감사는 참 쉽죠잉?
감사는 참 쉽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100점을 받아 왔다. 아이들이 대학 입학시험에 덜커덕 붙었다. 삼포시대(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신조어)라는데 자녀들이 연애도 예쁘게 하고, 직장도 보란 듯이 들어가고, 결혼해 자손도 오순도순 생긴다. 이러면 입이 찢어져라 노래 부르고 싱글벙글 감사가 넘친다. 이렇게 좋은 일만 있는데 어느 누군들 감사를 안 하겠는가?
직장에서는 좋은 상사들이 친절히 대해 주고, 영업 성과가 눈에 보이게 팍팍 쌓이며, 승진에 보너스까지 챙기는 순풍에 돛 단 듯 나아가는 삶이라면 누구나 “만복의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삶이 이렇게 ‘노 프라블럼!’(no problem) 하고 풀린다면 감사하는 게 참 쉬운 일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 밑에 살면서 감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배은망덕한 심성이지 않겠는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사 1:3)이란 말씀처럼 순탄한 상황에서 나오는 감사는 짐승 수준의 반응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짐승들도 그 정도는 반응하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 이 시대의 실상은 결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풍파와 파도 속을 지나며
우리가 사는 현실은 파도타기 같다. 험한 산을 오르는 등산 같기도 하다. 단단히 준비하고 일상에 들어서지만 거친 파도 때문에 균형을 잃고 휩쓸리기도 한다. 즐겁게 산을 오르지만 폭우에 위협받기도 하고, 산사태를 만나기도 한다.
경제 위기로 젊은이들은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힘들고, 적잖은 나이에 직장을 떠나야 하는 기성세대들은 심정이 말이 아니다. 사건 사고가 매일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묻지 마 폭력’에 희생당하기도 하고, 아무 의심 없이 들어간 집이 깡통주택으로 돌변해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의 입에서는 감사보다는 한탄과 한숨이 더 쉽게 나온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유가족에게 감사는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 당신에게 실망했습니다”(필립 얀시), “주님, 왜 하필 저입니까! 제가 아니면 안 됩니까?”라는 인간적인 원망과 토로가 쉽게 나온다. “감사는 무슨 말라붙을”, “감사는 무슨 개뿔이나” 하는 말이 나오는 세태이다 보니 감사하는 게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성경은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친다. 감사는 신앙인의 조건이 아니라 필수이다. 말씀이 우리를 강권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감사하라고!
감사는 믿음과 동행하고 선행한다
감사는 믿음이 기초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믿음의 기초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섭리에 근거한다. 감사는 주 예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죄인인 인생을 받아 주시고 구원하신다는 사랑을 인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감사는 믿음으로 인해 세계관에 변혁이 일어난 이에게 가능한 감성이다. 행(幸)과 불행(不幸)이 교차하는 세속 사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발효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건 하나하나에 말초신경적인 반응을 드러낼 것이 아니다. 사건의 속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생각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먹구름은 곧 걷힌다. 내 뜻대로 이뤄졌기 때문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단계(히 5:13)다. 보다 본질적인 감사는 ‘아버지의 뜻’이 있고, 그 뜻대로 이뤄진 것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상황을 뛰어넘는 감사
하나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시고 영원히 일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궁극적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난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죄인 된 ‘나’의 현실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면 감사가 샘솟는다. 보다 진실된 감사는 응답에 선행(先行)한다.
감사는 현실을 뒤집어엎는 혁명적 언어다. 보다 ‘무서운’ 감사, 세상이 감당치 못할(히 11:38) 감사가 역설의 감사다. 상황이 내 뜻에는 반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때 드리는 감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단 3:18)라고 고백한 다니엘의 세 친구, “비록 소출이 없으며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라고 고백한 하박국 선지자의 결단은 감사의 좋은 교훈이 된다.
비록 우리가 다니엘이나 하박국 같은 믿음이 없을지라도, 그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 것을 확인한다면,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는 상황이 아닌 믿음에서 출발한다. 상황을 뛰어넘는(超克) 감사, 그것이 진정한 감사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오, 주여! 감사하지 못하는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