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소개

2017년 01월

‘조선을 향한 마지막 기도’ - 토마스 선교사

선교사소개 이용남 선교사_ 세계선교공동체

토마스 선교사 (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1866년 선교를 위해 영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던 조선 병사들에게 성경책 한 권과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다.





“1866년 여름, 불길에 휩싸인 선박이 내뿜는 화마와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달궈진 모래사장에 조선 관군에게 둘러싸인 파란 눈의 이방인이 무릎을 꿇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선을 가슴에 품은 27세의 젊은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27세의 젊은이는 ‘복음’에 자신의 삶을 내어드린 조선 땅에 첫 번째 순교자인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자신에게 칼을 겨눈 병사에게 성경을 전하고, 이 나라와 백성의 삶 그리고 복음 전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 현장을 지켜본 한 병사의 고백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여럿 죽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천이 덮인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내게 받으라고 권했다. 내가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이 책은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 왔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오랜 인습(因習)과 흑암(黑暗)에 갇혀 있던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이 땅에 온 복음 전도자 토마스 선교사는 그렇게 순교자가 됐다. 한 알의 밀알이 돼 썩어져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생명의 위험 앞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이제 그의 아름다운 선교 행전의 여정을 되짚어 보려 한다.


아내의 죽음과 조선인과의 만남
1863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선교의 비전을 품고 아내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24세의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서의 첫 번째 선교 편지를 눈물로 써 내려갔다.
“제가 영국을 떠나 여기서 처음 쓰는 편지가 이런 슬픈 소식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3월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로 인해 저는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니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참을 길이 없습니다. 이전보다 더 귀한 선교 사역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만 현재는 다시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습니다”(1864. 04. 05. 편지).
토마스 선교사는 1864년 12월, 선교사 직분을 내려놓았다. 선교의 동역자이며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던 상처와 소속 선교부와의 갈등은 24세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의 주인이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상처에는 딱지가 앉고, 갈등은 견고한 울타리가 돼 그의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됐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연단의 시기를 보낸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왔던 조선인 김자평(金子平)과 그 일행들과의 만남을 예비하셨다. 조선인과의 만남을 통해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세운 토마스는 조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조선어를 공부하며 조선을 방문할 계획을 준비했다.


위험을 감수하며 조선 땅을 향하다
1865년 9월, 고대하며 기도하던 그날이 왔다. 토마스 선교사는 작은 목선에 몸을 의지해 중국과 조선을 잇는 서해 연안 황해 지역의 작은 섬들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방문한 땅은 백령도(白翎島)였는데, 이후 그는 창린도(昌麟島)까지 다다른다.
그가 한 권의 성경을 전하면서 수많은 위험을 감내한 이유는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굳게 닫혀 있던 조선의 문을 두드린 토마스 선교사는 서양인에 대한 선입견과 적대감에 시달리고, 큰 풍랑의 위험을 겪으며 50여 일간의 첫 번째 조선 방문을 마치고 4개월 만에 다시 베이징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그는 작은 선물을 받았다. 바로 런던선교회로부터 소속 선교사로 재신임을 받은 것이다. 그는 조선어 공부에 더욱 매진했고, 본격적인 조선 선교를 꿈꾸며 기도했다.
이런 간절한 기도와 바람은 이듬해인 병인년(1866년)에 응답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통역관으로 승선해 꿈에 그리던 조선으로 향하게 됐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로부터 받을 환영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오르고 희망에 부풉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기 위해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이 언젠가는 반드시 인정받으리라 믿으며 나는 갑니다.”


제너럴 셔먼호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더불어 그는 조선의 정치적 상황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대학살이 바로 1866년 2월에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다. 병인박해로 인해 수많은 가톨릭 신도들이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잠두봉(절두산)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전국적으로 8,000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열어야 함을 알았기에 토마스 선교사는 그해 8월, ‘제너럴 셔먼호’에 몸을 실었다.
평양 대동강 한사정 여울목에 정박한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관군의 공격으로 인해 침몰했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대동강 변으로 헤엄쳐 나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 관군들은 쇄국 정책의 기치 아래 서양 문물을 전하거나 따르는 사람들을 찾아내 참수시켰다. 이때 개항을 요구한 선원들은 그 자리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 조선 선교의 큰 꿈을 가지고 대동강 변에 첫 발을 내딛었던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도 대동강 한사정 여울목에서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칼을 겨누던 병사를 위해 기도했고, 성경을 건넸다. 그의 성경을 받은 이가 글머리에 소개된 고백의 주인공인 박춘권이다. 그는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평양안주교회의 장로가 돼 첫 번째 순교자의 이야기를 전하며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150여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며 살았던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린 토마스 선교사는 그렇게 조선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됐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해 복음 전파를 위해 전심전력했던 토마스 선교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흔적이 됐고 사랑의 증거가 됐다.
터툴리안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라고 말했다. 굳게 닫힌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던 토마스 선교사의 선교 행전은 두드림으로 끝났지만, 그 결과는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한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그 생명 행전의 열매는 오늘날 천만이 넘는 한국 성도를 태동하게 했고, 한국 교회는 이만 명 이상의 선교사를 전 세계에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 순교의 피는 생명을 낳는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