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유적지 이소윤 작가_ 방송작가, 코리아바이블로드선교회
불시착으로 야월도에 간 유진 벨
1908년 봄, 목포 선교부에 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법성포로 향하는 전도여행길에 올랐다. 조기잡이로 유명한 법성포는 이 일대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성경 속 장소와 비교하자면 고린도나 에베소와 같이 인근 섬에서 어부들이 잡은 고기를 팔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다.
목포에 있던 유진 벨 선교사는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법성포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었다. 그런데 법성포로 가던 그는 길을 잘못 들어 한 외딴 섬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야월도 선착장’이다.
어지러운 구한말,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온갖 미신이 퍼지고 있었다. 그중 거친 바다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해안마을은 토속 미신의 온상이었다. 섬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경계했다. 더욱이 외국인들은 서양 귀신을 몰고 오는 불운의 상징으로 여겼다. 외국인들이 섬사람들에게 쫓겨나는 건 다반사였고, 자칫 잘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외국인에다 선교사인 유진 벨이 낯선 섬에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염산리교회(현 야월교회)의 탄생
그러나 유진 벨은 발길을 돌려 법성포로 돌아가지 않고 불시착한 섬 안으로 들어간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필시 ‘불시착’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유진벨은 조선에 온 지 10년이 넘어서 우리말도 유창했을 뿐 아니라, 전남 선교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전도 여행에는 길을 안내하는 현지인이 동행했다.
법성포는 비교적 큰 항구로, 웬만한 뱃사람이라면 법성포로 가는 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성포로 가던 배가 길을 잃고 불시착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유진 벨 선교사는 ‘하나님께서는 법성포가 아닌 야월도로 가기 원하신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주님께 의지해 섬 안으로 들어간 유진 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섬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알고 있었고, 유진 벨이 불시착한 그 즈음 간절하게 그들을 이끌어 줄 목회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섬사람들은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기뻐하며 유진 벨을 환영했다.
이에 감동한 유진 벨은 목포로 돌아가 즉각 이 사실을 전남노회에 보고하고, 야월도에 있는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세워 전남노회에 정식으로 등록한다. 그렇게 1908년 4월에 ‘염산리교회’가 탄생한다. 염산리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야월교회’다.
섬 주민들의 순수한 신앙이 전남 지역 교회에 알려지고, 이에 감동한 목회자들이 염산리교회를 섬긴다. 특히 당대 전남지역에서 이름을 널리 떨친 깡패 출신의 최흥종 목사가 1년간 염산리교회를 섬긴다. 그를 통해 불꽃같이 순결하고 강인한 신앙을 물려받은 염산리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은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갔다. 그러던 중 1937년,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손양원 목사가 부흥집회를 통해 이들에게 뜨거운 순교신앙의 불을 지폈다.
순교의 성지가 된 교회
마침내 애타게 기다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한국 전쟁과 함께 염산리교회는 뜻밖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최종한 장로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일 전 22일에 김삼용이 공산군을 데리고 와서 3일 동안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공산군 한 사람이 마을에 숨어 있었는데, 그걸 안 정문성 집사님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그를 바로 총살했지요.”
이 사실이 북한군에게 알려지면서, 염산리교회 성도들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때부터 무려 석 달간 북한군은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성도들을 죽였다.
염산면 두우리 큰북재 너머에는 작은 마을 묘지가 있다. 그 옆에는 잡초가 무성한 작은 둔덕이 있는데, 순교자들이 생매장한 당한 곳이다. 공산군은 이곳에 깊은 구덩이를 파 성도들을 생매장했다. 반항하면 칼이나 대창으로 찔러 강제로 구덩이에 몰아넣고 흙으로 덮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손상기 집사는 밤마다 북한군들이 교인들을 끌고 오는 것을 봤으며, 그때의 참혹했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저녁마다 이곳 모래밭에서 교인들을 숙청했어요. 죽을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고, 잡혀온 사람들이 무슨 정신이 있겠어요. 차례차례. 죽여서 메우고 죽여서 메우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들의 죽음을 기억해야 했기에, 지금까지 이를 간직하며 살아왔다. 예수를 부인하라는 북한군 앞에서 성도들은 의연하게 죽음을 택했다. 일제의 칼날을 통해 단련된 성도들의 강인한 신앙은 북한군의 총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시 북한군에게 희생된 이들 가운데는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순교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에게 총칼을 들이대는 원수들의 영혼을 걱정했다. 그렇게 65명의 성도들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며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교인들이 모두 숨을 거둔 뒤, 공산당은 교회 건물마저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헛되지 않은 순교의 피
박해와 순교로 그 땅에 희망이 사라진 듯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성도들의 순교가 있은 지 38년 뒤인 1988년에 배길양 목사가 염산리교회에 부임했다. 그때는 교회 이름이 ‘야월교회’로 바뀐 뒤였다. 배길양 목사는 이곳에 부임하기 전까지 이 지역 성도들의 순교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교회 온 지 3일이 지났을 때 환상을 봤는데, 교회 안에 지금의 교인들이 아닌 다른 교인들이 가득 앉아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만 이 환상을 본 게 아니라 2~3일 후에 또 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 이 교회는 현재도 중요하지만 이전 교회의 모습도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전 교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거듭되는 환상을 통해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낀 배길양 목사는 까마득하게 잊힌 순교의 역사를 찾아 나선다. 순교자들을 일일이 찾아내 명단을 작성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나 어린아이들은 직접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배 목사는 65명의 순교자를 모두 찾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순교하신 분들은 충분히 도피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도피하신 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분들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다른 교인들이 순교했다는데 혼자 순교의 자리를 피해 살아갈 수가 없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들이 다 돌아와서 순교했던 것입니다.”
아담한 서양식 건물인 야월교회는 1975년에 세워졌다. 당시에는 나름 멋있게 지은 건물이었지만, 강풍이 불거나 태풍이 오면 무너질 위험성이 있어서 곧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예정이다.
2009년에 완공된 순교기념관은 야월교회뿐 아니라 영광지역의 순교 역사와 순교자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호남 선교의 역사를 비롯해 순교 영성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실과 한국 교회 대표적인 순교자들의 사진이 전시된 추모관이 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전시관 중앙부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 ‘맞잡은 손’이다. 이 손의 의미를 야월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맞잡은 손 중에서 한쪽 손은 상처 나고 찢긴 손이고, 한쪽 손은 거룩한 손입니다. 상처 난 손은 순교자들의 아픔을 표현하고, 거룩한 손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더 나아가 용서와 화해를 이루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현재 야월교회 성도들 중에는, 순교를 목격했거나 목격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많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65명의 순교자들이 품었던 뜨겁고 정결한 순교신앙의 불씨는 이제 남은 자들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