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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9월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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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한복판에서 예기치 않은 풍랑을 만나게 됐다. 어떤 이들은 무릎 꿇고 기도했고, 어떤 이들은 가족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모두들 공포에 질려서 얼굴이 새파랗게 됐다. 이 와중에 평온을 유지하는 한 중년 부인이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 옅은 미소, 온화한 표정에는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소원이 간절해서였는지 배는 무사히 항구에 도착했다. 모든 사람이 재빨리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이 부인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한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었습니까?”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오래전에 둘째 딸을 잃었습니다. 둘째 딸은 지금 주님의 품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죠. 큰딸은 보스턴에 살고 있고요. 만약 풍랑이 우리를 덮치게 된다면 저는 꿈속에서조차 그렇게 그리던 둘째 딸 곁에 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풍랑이 우리를 비껴가 준다면 저는 원래의 목적대로 큰딸 곁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사랑하는 딸 곁으로 갈 텐데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
이를 일러 ‘생각의 틀’, 프레임이라 말한다. 상황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기회로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감사, 감격, 감동이 넘쳐난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최선의 기회를 최악의 상황으로 해석했다. 자유를 찾아 떠나온 광야 길인데 굶주림으로 인도한 죽음의 길이라 원망한다. 일부러 그 길로 인도한 것이라 여기며 의심한다. 눈앞의 배고픔 때문에 눈앞에 펼쳐질 복을 헌신짝처럼 내던진다. 이러니 불평, 불만, 원망의 늪에 빠져든다.
가정 안에도 왜곡된 해석이 난무한다. 작은 불편에 큰 사랑을 의심한다. “당신, 나 골탕 먹이려 일부러 그런 거지?”, “너 엄마 말 안 듣기로 작정한 거지?”, “당신 나만 무시하는 거지?”, “아빠는 나만 미워하는 게 틀림없어” 등등.
생각이 뒤틀리니 감정은 꼬이고, 행동은 엇박자다. 누렸던 은혜는 온데간데없다. 다가올 복은 반갑지도 않다. 어느 순간, 행복은 저만치 달아난다. 행복은 가진 것을 사랑하지만, 불행은 가지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