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을 묶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종종 약속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약속을 통해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사울은 그가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을 때와 달리 이 약속을 저버리고 만다. 사울 왕은 신실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통치했다. 결국 하나님은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 15:1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후회는 우리의 후회처럼 심경의 변화가 아니라, 방법이나 섭리의 변경이었다.
사울은 자신의 승리에 대한 개선문 곧 기념비를 갈멜에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명예를 구했다. 그리고 길갈로 내려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죄악을 지적하는 사무엘에게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내가 할 일을 다 했습니다”(삼상 15:20)라고 대응한다. 물론 사울은 탈취물을 남긴 것에 있어 그것은 ‘완전히 진멸되어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고의적인 낭비라고 생각했다.
사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각과 편리를 위해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 조정한 것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악한 일이 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사울은 사무엘의 경고와 하나님의 법을 모두 어긴 것이 되어 하나님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고 만다.
우리 역시 사울과 같은 실수를 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더 원하실 것이라는 나의 기준의 늪에 빠져 합리화를 시도하는 우를 범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만일 나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이려 한다면 그것은 고집과 불순종이다.
남자들이여,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가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 보시기에도, 가족들 보기에도 내 고집대로, 내 멋대로 사는 모습이 많지는 않았는가? 이제 나의 관점, 나의 방식,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생각들을 내려놓자. 나의 방법과 생각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생각으로 대체해 보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한 인생을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