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사랑의교회)
이번 호에서 만나는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믿음은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인가, 혹시 죽은 믿음은 아닌가” 하고 강력하게 도전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다. 그는 우리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14~26)이라는 말씀을 선포한 인물이다. 하지만 야고보의 이 확고한 가르침에 우리가 다소 머뭇거리는 이유는 신약 교회가 대체로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개혁 이후 ‘이신칭의’ 교리를 진리로 고백하는 개신교의 입장에서 야고보서가 전하는 메시지는 적지 않게 당황스럽고, 그런 메시지를 강조하는 야고보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야고보는 과연 ‘오직 믿음’의 원리와 상반되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야고보 역시 ‘오직 믿음’의 원리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이처럼 야고보가 모든 가르침의 출발로 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그러나 야고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묘사를 반복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헛되고 허망한지를 교훈한다. 그가 강력하게 가르치는 ‘행함’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약 2:8; 막 12:31). 그는 ‘오직 믿음’의 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그토록 행함을 강조했을까? 야고보서 1장 1절을 보면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한다. 이 짧은 소개는 야고보가 어떤 인물인지를 한눈에 보게 하고, 동시에 그가 확신에 차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는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30년 가까이 한 부모 품에서 자란 친형의 노예라고 이해하고, 그것을 공적으로 고백하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 깨닫기 전까지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단지 형, 그것도 자신을 메시아라 주장하는 이상한 형이었을 뿐이다(참조 막 3:21, 31).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야고보는 그 형이 단지 자신의 혈육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십자가 형벌로 죽은 형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고전 15:7).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이나 지상에 계시면서 부활을 확인시키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친히 알리신 후에 승천하셨다(행 1:3).
이 놀라운 일을 똑똑히 목격한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육신의 형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 편지의 첫 구절에서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특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호칭한 것은 야고보 자신도 초대 교회가 공통적으로 깨달은 예수님의 복음과 그분에 대한 압축된 기독론적 신앙고백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고보에게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겨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산 믿음과 죽은 믿음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이다. 야고보처럼 예수님을 참 하나님이며,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다면 우리 또한 그 말씀을 삶에 비춰봐야 마땅하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참 구원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사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오직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은 참 구원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의 길(약 1:27)과 하나님께 순복하는 겸손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야고보서 묵상을 통해 야고보가 깨닫게 된 그 살아 있는 믿음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