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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

슬픔을 은혜의 길로 만든 사람 므비보셋

과월호 보기 박삼열 목사

사무엘하에 등장하는 인물 므비보셋! 정치역학의 구도로 본다면 그는 다윗과 적수의 관계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집착했던 사울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자신의 생명과 삶을 다윗의 손에 맡기고(삼하 19:27), 다윗은 그에게 약속을 지키며 자비를 베푼다(삼하 19:29, 9:1~13). 그를 통해 성경이 말하려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신앙적 관계가 삶의 배경이 되다
이스라엘의 사울과 그의 군대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침략에 맞서야 했던 적이 있었다(삼상 17장). 이때 이스라엘은 골리앗의 등장 앞에 한마디로 쩔쩔맨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 총체적 불가능의 상황과 위기를 일순간에 뒤바꾼 인물이 나타났으니 바로 다윗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등장, 그리고 물맷돌로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꿈같은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면서 절망에서 승리로, 소망할 수 없었던 현실을 승리의 현실로 바꿈으로써 상관없어 보였던 두 상황 사이를 이어낸 믿음의 사람 다윗을 발견했다. 이 발견의 기쁨 또는 만남의 희열이 얼마나 컸던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 18:1~4).
‘언약’을 맺었다는 것도 강한 표현이거니와 당시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표라고 할 수 있는 왕자의 겉옷과 띠를 양치기 목동에게 주었다는 것은 언약과 더불어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확인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물론 이 둘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었기에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관계적 배경은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정적(政敵)의 아들로 여겨질 수 있는 전운이 감도는 시대를 돌파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양분의 뿌리는 요나단의 마음을 뜨겁게 한 다윗의 믿음이었을 것이다.


유혹과 오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긴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증명하는 므비보셋에게 커다란 도전이 찾아왔다. 이미 압살롬의 반역은 성공적이었고(삼하 15:12~13), 다윗과 그의 신하들은 빨리 도망해야 했으며(삼하 15:14),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치욕스럽게 도성을 탈출해야 했다(삼하 15:30). 신속하고도 힘 있게 진행되는 이 성공적인 반역 앞에서 므비보셋은 꺼져버린 아버지 요나단의 꿈을 되살릴 명분과 상황을 손쉽게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다리가 불편한 므비보셋으로서는 자신의 지체장애 원인이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삼하 4:4) 격동의 정세를 틈타 지난 세월의 모든 아픔을 일소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왕의 자리가 자신이 아니라 다윗에게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견지한다. 그의 종 시바가 속여 가며 꾸며낸 말, 곧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삼하 16:3)는 말이 다윗을 설득시킬 만큼 므비보셋은 반역의 오해의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 판이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반역이 잠잠해진 다음 다윗이 바로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을 봐서도 더욱 분명하다.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삼하 19:25).
다윗의 집안과 사울의 집안 사이에 있었던 오해의 관계 속에서, 또 반역의 정치적 격동기 한가운데서, 그리고 종의 교묘한 속임수와 꾸밈이라는 삼중적인 혼돈의 와중에서 므비보셋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지 않는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 준다.

 

“종이 무엇이기에”의 신앙
신앙이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것이요,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권모술수나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찌 가능할까? 므비보셋의 말에서 우리는 그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삼하 19:28).
이 말은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었던 므비보셋의 자기 이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이해를 그가 격동적 상황을 초월해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배울 수 있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삼하 9:8).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기 부인 없이는 도무지 그분의 은혜를 은혜로서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죄로 인해 죽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을 통해 은혜의 길을 만든 므비보셋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박삼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