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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열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라는 말씀(잠 16:18)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시지만, 교만한 태도는 반드시 다루십니다. 불의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으로 세속의 권력자를 다루십니다. 그 결과 긍휼과 공의의 통치를 실행하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 군주인 느부갓네살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기다리시며 기회를 주시는 그 사랑을 확인해 봅시다.
말씀의 씨를 뿌리며
1. 다니엘이 번민하며 해석하기를 주저했던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은 무엇입니까?(20~23절)
-> 나무가 자라서 하늘까지 닿고(20절),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 만민이 먹을 수 있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가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인데(21절),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나무를 베라 명한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남기되 쇠와 놋줄로 동이고 그것을 풀 가운데 두면 하늘 이슬 젖고 들짐승과 더불어 살되 일곱 때 동안 그렇게 되리라고 말했다(23절).
2. 다니엘은 그 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24~26절) 느부갓네살에게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은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19, 27절)
->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고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게 되는데, 일곱 때 동안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 일을 통해 왕은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니엘은 이 꿈 해석을 하면서도 자신의 주군에게 이 일이 미치지 않기를 바라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피할 길을 제시한다.
3. 이 꿈의 예언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집니까? 작정한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동시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듭니까?(29~32절)
-> 느부갓네살이 꿈을 꾼 지 열두 달 만에 스스로 높여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할 때(일인칭 주어를 자주 사용한 것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예언이 즉시로 실행된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열두 달 동안 느부갓네살에게 다니엘을 통해 그 일이 성취되지 않을 즉, 피할 방법도 주셨다(27절). 그러나 느부갓네살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업적을 스스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작정한 일을 즉시 시행하셨다.
4. 하나님께서 세상 군주인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한 성품을 치유하고, 오히려 그의 나라를 견고히 하기 위해 취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서 무엇을 느낍니까?(25~27절)
-> 느부갓네살 왕이 비록 세속 군주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의 교만한 성품을 치유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모든 권세와 통치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주어진다.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임을 알게 해 준다.
5. 혹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인생 막대기와 채찍의 경험이 있다면, 그 고난을 통과할 때 배우게 된 깨달음을 함께 나눠 봅시다.
6. 불의한 세상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시고, 사람을 높이기도 낮추기도 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피할 길을 내 주시기도 합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하나님을 보면서 혹시 회복해야 할 예배와 감사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달란트와 물질을 가지고 가난한 이웃을 향해 긍휼과 자비의 실천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삶의 열매를 거두며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이 제시한 긍휼과 공의의 통치를 실행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업적과 자랑을 늘어놓는 교만한 통치를 시행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과 고난이라는 과정을 겪는 것이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를 거절할 때 교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가혹한 성품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향해서도 긍휼과 공의를 나타내는 정치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고난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께서 진정한 통치자가 되심을 깨달은 느부갓네살 왕이 긍휼과 공의의 정치를 펼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보다 진지하게 사용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겸손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의 삶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 중이라면 그것이 형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임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