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날마다 솟는 샘물>은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 보고자 아모스서와 나훔서를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마저도 그 크기와 깊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와 나훔은 모두 하나님의 분노를 묵상하는 데 적절한 책이지만, 두 선지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분노는 그 대상과 의미에 있어서 선명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아모스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며, 자기 백성을 징계하심으로써 바른 길로 돌이키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서 나훔은 자신의 백성 유다를 핍박하는 니느웨(앗수르)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나훔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악한 세력은 망한다는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고통당하는 주의 백성을 위로합니다.
저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암 1~4장)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나라들의 도시를 거명하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자신의 예언을 시작합니다. 아람(다메섹), 블레셋(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페니키아(두로)가 저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곧 이어서 에돔, 암몬, 모압이라는 나라(민족)를 거명하며 그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판을 선포합니다(1:3~2:5).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면 아람, 블레셋, 페니키아는 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혈통의 나라이고, 에돔, 암몬, 모압은 이스라엘과 친척뻘 되는 나라들이며, 유다는 형제와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는 이 나라들과 모두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심판을 선포하는 아모스의 메시지가 환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곱 나라에 대한 심판 선포는 그저 서론에 불과했습니다. 아모스는 곧 본론으로 들어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으며, 그 책망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됩니다(2:6~4:13). 앞서 일곱 나라에 대해 선포된 심판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분노가 자기들에게 표현되는 것을 들으며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주변 일곱 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다른 나라의 범죄에 주목하며 손가락질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세상과 자신의 백성을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세상보다는 낫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우리 안에 있는 죄와 허물에 대해서 눈감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울리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세상과는 전혀 다른 정결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에서 돌이키라(암 5~6장)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언한 후에 애가를 지어 부릅니다(5:1~17). 이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절망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이처럼 절망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돌이켜 살 길을 찾으라”(5:4, 6, 14)고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애가가 끝난 후, 아모스는 “화 있을진저”라는 선포로 시작하는 두 개의 심판 선언문을 낭독합니다. 첫 번째(5:18~27)는 종교에 대한 저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꼬박꼬박 드렸고, 절기를 지키며, 모임을 갖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우상숭배가 포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정의나 공의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는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번째(6:1~14)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교만과 사치에 대한 저주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당시 북이스라엘은 상당한 수준의 부를 누렸지만, 대부분은 지도층에게 집중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 가난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주변 나라들에 비해 더 크거나 강대하지도 않았던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상아 상에 눕고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면서도 나라의 상태와 장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현실을 질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든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만 하면 아무 희망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내가 익숙한 대로 살면서 하나님도 함께 섬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근본적인 궤도 수정은 하지 않은 채, 조금씩 신앙적인 분위기와 색깔만 나타내는 식으로 살아서는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분노의 하나님 vs 긍휼의 하나님(암 7~9장)
아모스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치실 것인지를 선포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재앙이 이미 선포되었음에도 선지자의 중보로 인해 재앙이 취소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메뚜기의 재앙과 불의 재앙(7:1~5)을 선포하셨지만 아모스의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 서리이까”(7:2, 5)라는 중보기도 앞에 이것들을 취소하셨습니다. 이 두 재앙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진멸당하는 수준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하나님의 재앙을 가로막았고, 하나님은 아모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동시에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 앞에서 얼마나 심한 분노를 느끼셨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후에 선포되는 재앙들은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조와 귀족들,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취소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림줄을 보여 주시면서 이스라엘의 산당과 성소가 파괴되고 여로보암의 집, 즉 왕조가 무너지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7:7~9).
그리고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궁전에 시체가 가득한, 즉 귀족들이 멸절당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단의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고 무너져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이 깔려 죽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 어느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아모스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9:8)는 말씀과 이후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켜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것이 아모스서의 결론입니다(9:11~15). 이처럼 하나님은 극도의 분노를 표현하는 중에도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과 긍휼을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백성을 진멸하는 심판을 선지자의 중보기도 앞에서 철회하시고, 이스라엘의 왕권을 무너뜨리시더라도 다시 세워질 다윗의 장막을 바라보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참지 않으시는 하나님(나 1장)
나훔서를 통해 우리는 아모스서와는 또다른 하나님의 분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괴롭히는 적을 향한 분노입니다.
나훔은 뛰어난 표현력으로 유다의 원수였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니느웨는 이전에 요나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기도 했던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개했음에도 결국 니느웨는 선한 길을 걷지 않고 다시 타락과 광포의 길을 걸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영원한 심판을 나훔을 통해 선포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지만(1:3),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철저한 멸망을 안기시겠다는 선포입니다. 앗수르의 압박 아래 있었던 유다 백성에게는 이 선포야말로 커다란 위로이자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침략당하는 침략자(나 2장)
니느웨가 수도였던 앗수르는 당시 고대 근동의 잔인한 침략자였습니다. 나훔은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듯이 생동감 있는 언어로 앗수르가 자신들이 주위 나라들에 했던 잔인한 방법으로 허망하게 멸망당할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포를 통해 유다에게 힘을 주시고, 앗수르를 끝까지 대적하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유다는 비록 예루살렘 성을 지켰지만, 그 외의 다른 영토들에서 앗수르의 잔인한 폭행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들이 행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앙갚음이고, 정의의 선포입니다.
수모를 당하는 침략자(나 3장)
나훔은 니느웨가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고 수모를 당할 것인지를 선언함으로써 말씀을 마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자신들이 이전에 멸망시켰던 테베(노아몬 : ‘아몬 신의 보호 아래 있는 도시’라는 뜻)처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테베는 니느웨처럼 강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서 물줄기를 천연 요새로 삼아 오랫동안 번영했던 성읍이었지만, 앗수르 군대에 의해 정복당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을 뿐 아니라 아이들을 벽에 던져 죽이는 잔인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한 니느웨의 패망은 다른 나라들에는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만큼 포악한 악행을 저질렀던 도시가 한순간에 멸망을 당하고 자신들이 행했던 잔인한 방법대로 앙갚음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주위 나라들이 기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는 사실 자신의 백성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의 백성에게 분노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바로잡아 긍휼을 베풀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온전히 벌해 자신의 백성에게 구원과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이것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퍼부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주어질 사랑과 자비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할 필요도 있습니다. 나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나는 즉시 회개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 바로잡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악한 세력을 향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고 주님의 공의가 바로 세워지는 그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하나님의 분노 앞에 나 자신을 세워 정결하게 하고, 그 가운데 나타나는 놀라운 사랑과 긍휼을 맛보는 2월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