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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나기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날마다 솟는 샘물>은 한 해를 고린도후서로 시작하려 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간곡한 설득과 강력한 질책을 섞어가며 고린도교회에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나 본질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라고 요청하는 편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신앙, 참된 가르침,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우리가 어떤 모습을 신앙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
고린도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적대세력이었던 거짓 사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해 세운 후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러 떠난 뒤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써 줬다고 하는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베드로, 요한 등)이 써 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추천 받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인 데에 비해 바울은 아무런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환상, 계시와 같은 신령한 체험과 지식을 기초로 영감을 받은 권위 있는 말씀을 전한다고 주장하며 교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했습니다(11:13, 20).
사실 이 거짓 사도들이 의존하는 것은 복음 그 자체가 아니라 ‘껍데기’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개척해 그들 가운데 생명의 복음이 살아 역사하게 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사도성의 근거로 삼았지만(3:2), 그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써줬다고 하는 추천서 한 장을 자신들의 사도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의존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언변과 외모를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들의 말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이런 적대세력에 대해 반박하고, 이전까지 계속되었던 사역(예루살렘을 위한 연보)을 추진할 것을 촉구하는 글입니다. 특히 가르침과 행동방식이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합치되지 않는 거짓 사도들에 의해 교회가 휘둘려서는 안 되었기에 바울은 적극적으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그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복음 사역자들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가 자세히 드러납니다.

고난당하는 조력자(고후 1:1~2:13)
바울이 보여 주는 첫 번째 참된 복음 사역자의 모습은 영광이 아닌 고난을 당하는 모습이며, 지휘자가 아니라 조력자의 모습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였기에, 바울이 마음만 먹었다면 교회 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발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해 어떤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고, 그저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근심하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교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고린도를 떠나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사형선고와도 같은 고난을 겪었습니다(1:9).
이런 바울의 모습은 거짓 사도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누리려 했습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것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교인들이 잘못 나가고 있을 때 그들을 주관하며 통제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근심을 더하지 않으면서도(2:1~2) 주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주관자가 아니라 돕는 자로 바라보았고, 그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했습니다.

보배를 담은 질그릇(고후 2:14~7:4)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게 된 이야기를 하다가(2:13) 갑자기 다른 내용의 본문을 서술해 나가고, 이후에 다시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7:5)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이 ‘삽입부’를 통해 참 그리스도인, 참 사도가 어떤 존재이며, 거룩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그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외형적으로는 그다지 멋지거나 아름다울 것이 없는 모습입니다. 
참된 복음의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살아갑니다(2:15). ‘향기’라는 말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즉 참 그리스도인, 참 사역자는 제단 위 제물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추천서, 오늘날로 치면 증명서나 자격증에 근거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3:1~2).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할 뿐이며,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종이 되기를 자처합니다(4:5).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도 같은 고난을 경험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조롱을 당하면서도 그 때문에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기쁨으로 감당하겠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4:15, 5:13).
그렇기에 참 사역자들은 겉모습만 보아서는 그다지 멋지거나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들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것과 같이(4:7) 그들 안에 품은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5:14)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과 하나님을, 사람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성실하게 이행합니다. 이 때문에 환난과 궁핍과 고난이 오지만, 그들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6:10)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그려가다가 특별히 중요시하는 관심사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다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세상의 믿지 않는 자와 같이 멍에를 메고 살지 말고 오직 구별된 자로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고 가르칩니다(6:14~7:1). 낮아지고 희생하고 고난당하면서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보배를 가졌음에 기뻐하는 삶,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이자 참 사역자의 삶이며,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사역자의 위로(고후 7:5~16)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고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위로를 허락하기도 하셨는데, 바로 고린도교회의 회개 소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슬퍼하는 내용의 편지를 디도의 손에 들려 고린도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디도를 보내고 나니 그 편지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할까봐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바울의 편지를 보고 많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디도로부터 들은 바울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참된 사역자의 위로는 이처럼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이 죄로부터 떠나 참 복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나누는 봉사의 직무(고후 8~9장)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이 했던 중요한 직무 중 하나가 바로 헬라인 교회들로부터 연보를 걷어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장벽을 허물고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복음을 먼저 받은 헬라인 교회들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교회들을 돕자고 독려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 연보를 걷는 일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역자들에 의해 투명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8:16~24).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권면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가난하게 되심을 본받고자 하는 의도(8:9)로 이뤄져야지, 인색함이나 억지로 이뤄져서는 안 되며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헌금할 것을 권면합니다(9:7).
바울은 자신의 대적들이 이 사역을 의심하며 비방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평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었기에 여러 오해와 비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일을 꾸준히 진행했고, 성도들을 독려했습니다.

참 사역자가 의지하는 것(고후 10~13장)
바울은 비록 디도에 의해 고린도교회의 회개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7:7), 아직 고린도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에 대한 강력한 변론으로 편지를 맺습니다. 이 가운데 참 사역자가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참 사역자는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에 권세를 휘두르며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10장). 언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로 교회를 섬겼는지도 내세우지 않습니다(11장). 또한 바울도 얼마든지 신비한 체험을 했던 사람이지만 그 조차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12장).
바울과 같은 참된 사역자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10:4). 바울은 자신에게 충분히 내세울만한 지식이나 배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11:22), 교회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11:23~29), 누구보다도 큰 신비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12:1~4) 그가 내세운 것은 자신의 약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 가운데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만을 내세우고 자랑했습니다(12:9).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과연 어떤 권위를 따랐으며 무엇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기 바랍니다. 과연 육신에 속한 것들, 껍데기와 같은 것들에 중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신앙의 방향타를 참된 것, 하나님의 능력과 십자가의 복음에 맞춰야 합니다. 주후 2013년 1월이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점이자 믿음의 본질로 돌이키는 회귀점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