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번성하고 형통하는 삶을 꿈꿉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삶 가운데 적용하려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3월에는 사무엘하의 앞부분이자 사무엘서(사무엘상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사울의 죽음 이후 다윗이 어떻게 흥왕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본문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흥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 앞에 놓인 갈림길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섭리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3월 묵상을 통해 우리도 주님 안에서 흥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앞세움(1장)
다윗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 왕 아기스로부터 시글락을 봉토로 받아 거기 머무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블레셋의 장군으로서 전쟁에 나서야 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다윗은 블레셋 신하들의 반대 덕분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다윗이 자리를 비운 동안
시글락을 약탈한 아말렉을 추격해 모든 것을 되찾아 시글락에 돌아와 있었습니다(삼상 29~30장).
이때 사울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이유가 사울의 추격 때문이었으므로,
누가 보더라도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기뻐할만 했습니다.
또 다윗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외적으로는 블레셋의 신하였기에 적어도
블레셋의 승리를 기뻐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을 뿐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곡하는 노래를 지어
자기 백성에게 부르게 했습니다. 이는 적군의 왕과 장수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슬퍼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지만
다윗은 이런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 소년을 죽이라고까지 명령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한 이유는 요나단을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울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기쁨과 슬픔의 기준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의 개인적 인간관계나 자신의 정치적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권위가 실추된 부분에 대해서만 애곡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유익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과 권위가 세워짐을 기뻐하며,
그렇지 않을 때 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림(2:1~11)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전의 쓴맛을 본 상황에서 다윗은 즉시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세워집니다.
죽은 사울의 왕위는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넘어갔습니다.
독특한 것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반을 통치한 데에 비해 이스보셋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불과 2년을 통치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된 후 5년 반이 지나도록 사울의 후계자 자리는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위까지 차지할 수 있는 군사력과 시간이 있었지만,
5년 반 동안 다윗이 한 일이라고 기록된 것은 사울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른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치하한 것뿐입니다(2:4b~7).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서둘러 자신의 왕위를 세우려 하지 않고, 형제들이 자기를 인정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려 노력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함(2:12~4장)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결국 다윗과 이스보셋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들이 전쟁을 했다 해도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동생 아사헬
죽이기를 꺼려했습니다(2:18~23).
요압과 아브넬이 전쟁을 하면서도 서로에게 형제를 죽이려 한다고 비난하는 모습(2:26~27),
그리고 전사자가 다윗 측에서 20명, 아브넬 측에서 360명으로 그다지 많지 않음(2:30~31)을 볼 때에
이들은 근본적으로 형제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전을 거듭할수록 더 강해져 갔지만(3:1), 이스보셋을 따르던 자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내분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스보셋과 사이가 틀어진 아브넬이 다윗에게 투항하자
다윗은 아브넬에게 자신과 사울의 딸 미갈이 다시 합치도록 주선할 것을 요구합니다(3:14).
이는 다윗이 사울의 사위, 이스보셋의 매형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이미 아브넬이 투항한 상황에서 적의 왕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친척 관계임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스보셋은 적군의 왕이 아니라 처남이었고, 그를 따르던 모든 군사는 형제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아브넬이 요압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다윗은 이 소식에 심히 통곡하며 그의 상여를 따라갈 뿐 아니라 애도하는 시를 짓고
그를 죽인 자신의 심복 요압을 저주합니다(3:28~39).
다윗이 이처럼 쉽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아브넬마저도 형제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감정을 따라 행동하지 않고, 백성을 배려하고 그들과 최대한 충돌하지 않으려 노력했기에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되길 자처하며 적장의 죽음을 애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백성 사랑은 이스보셋의 죽음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이 암살당해
그 머리가 자기 앞에 오자 다윗은 분노하며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이스보셋을 의인이라고 칭하기까지 했습니다(4:11).
다윗은 전쟁을 치르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사랑했고,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5~8장)
사무엘하 5장부터 8장에는 다윗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이방인에 의해 왕궁이 세워졌으며,
신하로서 섬겼던 블레셋을 정복했고(5장), 이스라엘 주변 여러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모두 이겼습니다(8장).
솔직히 이런 승리와 풍요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잊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관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새 수도로 삼은 후 다윗은 즉시 하나님의 궤를 모시려고 합니다(6장).
비록 율법을 제대로 숙고하지 않아 운반 중에 웃사가 죽는 일을 당하기도 했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고백하기 원했습니다.
오벧에돔의 집에서 여호와의 궤를 모셔올 때에 직접 나가 힘을 다해 춤을 추며 찬양하는 다윗의 모습에서는
왕으로서 위엄을 뽐내고자 하는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은 왕궁에 있는데 하나님의 궤가 휘장 속에 있다는 사실에 불편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짜 왕이신 하나님이 어찌 휘장 속에 있을 수 있느냐는 생각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에 의해 다윗은 성전을 지을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타인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9~10장)
다윗은 승승장구하면서도 은혜를 베풀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낸 다윗은 그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합니다(9장).
왕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해 왕자와 같은 영광과 권위를 주었고, 사울의 모든 땅과 종을 회복시키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므비보셋이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는 다리를 저는 사람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적대하지 않는 다른 나라들에게도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 예로, 암몬의 나하스에게 은총을 베풀었고, 그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조문객을 파견하는 등
암몬에게 예우를 갖추었습니다. 비록 암몬이 다윗의 호의를 오해해 다윗의 신하들을 모욕했지만,
다윗은 그들의 악행에 대해 즉시 분노하기보다는 침착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10장).
적어도 이때까지 다윗은 하나님 안에서 흥하는 길을 걸었고, 거기에 합당한 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만을 사랑하며, 자신만을 높이려 하며, 베풀기보
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 급급합니다. 사실 사람이 아닌 짐승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짐승과 다름없는 동기로 행동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흥하는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타락한 본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 말씀이 가르치는 것에 순종하고,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참된 흥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흥하게 하심을 체험하는 한 달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