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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3월

복음은 흘러가야 복음이다

과월호 보기 조철민 목사(<날샘> 디렉터)

사도행전 14~20장에서는 13장부터 시작된 1차 전도여행의 마무리(행 13:1~14:28)와 예루살렘 공회에서의 구원 방법에 대한 재정립(행 15:1~35), 이후 새로운 동역자와 함께 시작된 2차 전도여행(행 15:36~16:40), 아덴과 고린도에서의 영적 전쟁(행 17:1~18:22), 그리고 에베소를 거점 삼아 확장되는 3차 전도여행의 여정(행 18:23~20:38)을 묵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은 정체될 수 없고, 반드시 흘러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장소와 대상, 인종과 문화에 상관없이 복음은 흘러가야 하며, 이는 복음을 함께 전할 사람이 바뀌어도 예외가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수많은 핍박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어떻게 복음을 흘러가게 하시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흐르다(행 14:1~28)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귀부인들과 시내 유력자들의 선동으로 도망자 신세가 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고니온은 시리아에서 에베소로 이어지는 동서부 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사도들에게는 복음 전파를 위한 허브와도 같은 장소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통상적 관례에 따라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여기서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복음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복음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핍박으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는 사역의 장소를 루스드라와 더베로 옮기게 됩니다(행 14:1~6).
핍박을 피해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옮겨 온 바울과 바나바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만나고 그를 치유합니다. 이 기적을 목도한 사람들은 두 사도를 신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자신의 관점으로 이해해, 참된 하나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고, 이로 인해 바울은 또다시 다른 지역으로 몸을 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울로 하여금 1차 전도여행 시 개척한 곳을 돌아보게 하시며, 복음의 은혜가 각 교회마다 흐르게 하십니다(행 14:8~28). 이처럼 복음의 역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흐르는 놀라운 행보를 이어 갑니다.


율법의 한계를 넘어 흐르다(행 15:1~35)
복음의 핵심인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앞에 두고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유대인이 돼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발생합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징표였으나, 이방인에게도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야 하느냐를 놓고 예루살렘에서 첨예한 논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개최된 모임을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하는데, 복음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확장됨에 따라 발생한 사안을 정리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베드로와 야고보에 의해 정리됩니다. 오직 유대인이 돼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이는 것, 피를 멀리하는 율법도 성도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위해 함께 지켜져야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교리 정리는 율법의 한계를 넘어 확장됩니다. 이로써 복음은 유대교의 틀에 매이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동역자와 함께 흐르다(행 15:36~16:40)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 준비 중 마가의 동행에 대해 갈등합니다. ‘새로운 사람을 키울 것이냐’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데리고 가느냐’라는 의견의 차이로, 결국 바울은 실라와, 바나바는 마가와 팀을 이뤄 따로 사역합니다(행 15:36~15:41).
팀을 따로 꾸리게 된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바울과 실라에게 새로운 동역자들을 허락하십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디모데를, 드로아에서는 누가를 보내셔서 바울이 사역 중에 외롭지 않도록 도우십니다(행 16:1~10). 이로써 바울은 더욱 담대하게 사역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빌립보에서는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가 복음을 따랐고, 실라와 함께 붙잡힌 감옥에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바울이 새로운 동역자들과 함께 전파한 복음은 회당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도하러 간 강가에서(행 16:13~15), 구금된 감옥에서도(행 16:16~40) 계속 흘러갑니다. 이처럼 복음은 사람과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생명력 있게 확장돼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믿음으로 반응하는 주님의 제자가 돼야 합니다.


철학, 문화에 대항하며 흐르다(행 17:1~18:22)
바울과 실라가 사역했던 2차 전도여행의 거점 도시는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정리됩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3주간의 안식일 동안 복음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많은 유대인들이 회심했으나, 바울과 실라를 시기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성을 소동하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한 도시 전체를 흔들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습니다(행 17:1~9).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리 베뢰아 사람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자들이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반대하던 자들이 이곳까지 내려와 바울의 복음 전파를 방해합니다(행 17:10~15).
이후 바울과 실라는 아덴으로 이동합니다. 아덴은 지성의 중심지이자 최신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아덴 사람들은 복음을 새로운 학문 정도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여기는 아레오바고에서 회개를 명하지만, 그리스 철학으로 무장된 그들은 복음을 온전히 수용하지 않았습니다(행 17:16~34).
이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이동합니다.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동역하며, 실라와 디모데와도 재회합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이후 상황이 좋지 않아,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사역 장소를 옮깁니다. 음란한 문화로 도시 전체가 오염된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했던 18개월의 시간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지식인에 속하는 회당장 그리스보의 회심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행 18:1~11). 또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로마 총독 갈리오에게 고소했으나, 오히려 갈리오가 바울의 복음 전파 활동을 인정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복음 전파는 다시 진일보하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 철학과 문화에 대항하면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다시 한 번 개척했던 곳을 지나서, 예수님께서 가고자 하셨던 예루살렘으로 흐릅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흐르다(행 18:23~20:38)
거리로는 2,400km, 시간으로는 약 4년이 걸린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조용하게 시작됩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여행 때 제자가 된 사람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는데,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통과하는 노선으로 진행됩니다(행 18:23).
3차 전도여행의 주요 거점 도시는 에베소로, 바울은 여기서 열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성령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은사까지 받도록 합니다. 이후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다가, 다시 두란노 서원으로 장소를 옮겨 복음이 에베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초를 닦습니다(행 19:1~10).
바울은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하며, 마술책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마술을 버리는 결단을 하게 합니다. 또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이교도 순례자들에게 팔아 생계를 꾸리던 자들의 삶에도 제동을 겁니다. 이처럼 복음은 우상으로 물든 에베소를 강타하고, 위기를 맞는 듯한 상황에서도 더욱더 흥왕하며 확장돼 갑니다(행 19:11~41).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 사는 제자들을 만나 격려한 후 드로아로 향합니다. 이후 밀레도로 자리를 옮겼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행보와 같이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바울은 이 여정 가운데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믿음의 경주로 여기며,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남겨진 성도들을 걱정합니다. 예수님께서 남은 제자들을 걱정하시듯, 그는 지도자들에게 양 떼를 돌볼 것을 권하며 목자의 심정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행 20:1~38).


이처럼 복음은 결코 정체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성령님께서 생명력 있게 운행하시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흐르게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축복이요, 믿음의 용량을 확장시킬 좋은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성령님께서 쓰시는 복음 확장의 역사에 선택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성령님의 이끄심에 순종해, 믿음으로 복음 확장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