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가 말로만 하나님을 예배할 뿐, 실제로는 우상을 숭배했던 죄를 회개하고 성경의 진리로 돌아갈 것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이에 <날마다 솟는 샘물>은 2017년을 호세아서 묵상으로 시작하려 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배도와 우상 숭배에 대해 자신의 온몸을 바쳐 질타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니 “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호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율법, 곧 성경의 진리를 통해야만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편(1~3장)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번성했지만, 영적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느끼시는 배신감을 표출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는 음란한 여자 고멜과 결혼해 자녀를 낳아 장남을 이스르엘, 장녀는 로루하마, 차남은 로암미라 이름 짓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서 긍휼을 거두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며, 뿔뿔이 흩어지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1:2~9).
하나님의 분노는 마치 최선을 다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수고한 남편이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바알이 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공급하셨던 모든 것을 끊겠다고 선언하셨고(2:8~9),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노와 절연의 표현 뒤에 이스라엘과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헤어진 부부가 남편의 무조건적인 용서로 다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도 같습니다(2:19~20). 남편을 배신하고 떠났다가 버려진 비참한 여인 고멜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멜을 위해 값을 치르고 그녀를 다시 사랑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 대한 무지의 비극(4~6장)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 우상도 만들고, 바알 신상도 그 옆에 두며, 이방 종교의 예식을 차용해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방식으로 예배하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너무 무지한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수시로 율법을 인용합니다. 자신의 가정사를 통해 하나님의 분노와 사랑을 가르친 호세아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신 6:4)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책망을 전합니다(4:1).
이스라엘에게 있던 문제의 핵심은 바로 말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이 속죄제물을 많이 가져오는 것을 기뻐하며, 제사를 드린 후에 백성들에게 복이나 빌어 주는 종교업자들이 돼 있었습니다(4:6~10). 백성의 입장에서도 제사장들을 찾아가 복을 빌고, 음란한 예식에 참여해 즐기고 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니 괜히 힘들게 율법을 배우고 묵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5:1). 그런데 이 심판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웃 나라의 침공에 의해 멸망할 것입니다(5:8~9).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시고’(5:3), 그들이 뉘우치고 돌아오도록 이런 고난을 주십니다(5:15). 마치 잘못된 길을 가는 아들을 그냥 놔둘 수 없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벌하심으로 그들이 돌이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호세아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며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호소합니다. 호세아는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는 사실은 마치 새벽이 되면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고 가르칩니다(6:1~3). 사실 호세아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익혀야 한다고 설교한 모세의 가르침(참조 신 6:4~9)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에는 이교도나 다름없는 종교 행위가 있을 뿐 인애를 찾아볼 수 없는, 음란과 전쟁과 학살의 땅이었습니다(6:4~10). 무지는 무죄가 아닙니다. 무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에게 남은 것은 심판뿐입니다.
치유할 수 없는 죄악(7~8장)
부모라면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를 벌하기보다는 잘 타일러서 바로잡기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심판하시기보다는 치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혀 자신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용하던 화덕이 잠깐 불을 때지 않아도 여전히 뜨겁듯이, 이스라엘은 잠깐 회개했다가도 다시 죄의 불을 붙였습니다. 그 죄의 열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부터 파멸시켰습니다(7:1~7).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회개를 하려고 해도 누구에게 회개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황입니다(7:8~16). 이제 더 이상 ‘타일러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작 벌을 받을 상황에 처하자 울며불며 용서해 달라고 비는 아이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습니다. 바알 숭배도 계속됐고, 강대국을 의존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한다며 부르짖는 기도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결국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8:1~7).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기서 실리를 취할 수 없는 나라를 도와줄 이웃 나라는 없습니다. 수많은 제단을 쌓고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리도 만무합니다.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화려한 왕궁과 견고한 성읍을 자랑하기에 바빴던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8:8~14).
세속적 번영을 추구한 대가(9~10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명절을 주로 추수 시기와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추수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명절에 하나님과 바알을 같이 섬겼습니다. 바알을 풍요의 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9:1~9).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지 않는 이스라엘에게서 풍요까지 거두십니다(9:10~17).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10:4~8). 그들의 금송아지 우상은 앗수르에 빼앗길 것이며, 그들이 추구했던 세속적인 번영도 한순간에 앗아가실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힘이 생기자 이웃 나라를 수탈하는 죄까지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묵은 땅을 기경하라며(10:12),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풍요에 젖어 하나님을 잊고 죄를 범하면 모든 것을 빼앗으시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11~14장)
남편과 아내로 비유됐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은(1~3장) 다시 아버지와 아들로 비유됩니다. 아들 이스라엘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 다른 나라와 우상을 의지하다가 결국 탕자처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맙니다(11:1~6).
그러나 그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식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됩니다(참조 눅 15:20~24).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눈물짓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스라엘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의 불붙는 긍휼과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버리겠느냐”(11:8)라는 절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강력하게 보여 줍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얍복 강에서 씨름하던 야곱을 떠올리시며,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마음을 가지십니다(12:1~6).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일상에서는 저울을 속여 부당이득을 취하면서도, 성지순례는 자주 다니며 제사를 드리는 데에는 열심인 자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이는 야곱을 사랑하셨지만 그가 아버지를 속이자 빈털터리로 집에서 쫓겨나게 하시고, 라반의 집에서 힘써 일해 아내를 얻고 재산을 모으도록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12:12).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그들이 섬기던 우상이 그들을 풍요롭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13:2~3)과, 또한 그들의 손으로 세운 왕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13:10).
이스라엘이 겪는 모든 재앙은 귀환을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의 결론은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송아지로 드리는 제사보다 그 백성들의 입술에 말씀이 있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14:2).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셨지만,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만 하면 그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사랑할 것이며, 그 진노가 떠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4:4).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면 그곳이 바로 풍요로 가득한 천국이 될 것입니다(14:5~8).
호세아의 결론은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닌다”(14:9)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새해, 이 한 해를 말씀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날들로 만들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