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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세속화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을 따라가려 했던 어리석은 시도들이 많았고,
그 결과 심각한 부패에 빠지곤 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세속화’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신약의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9월에는 기드온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세속화의 함정에 빠져들며, 세속화된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기주의, 파벌주의로 시작한 세속화(8:1~17)
세속화가 진행되기 좋은 토양은 바로 ‘나’와 ‘우리’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풍조입니다.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잡아 처형한 에브라임 지파는(7:24~25) 왜 처음부터 자신들을 싸움에 부르지 않았냐며 기드온을 탓합니다. 승리를 기뻐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왜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았냐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8:1).
 또 요단 강 동편의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미디안의 왕 세바와 살문나를 뒤쫓는 기드온을 도우려 하지 않았는데, 만약 기드온이 패한다면 미디안으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8:4~9). 이들에게서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만을 도모하는 이기주의가 드러납니다.
 기드온의 태도도 아쉽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좋은 말로 대하더니(8:2~3),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는 강력하게 보복합니다(8:13~17). 물론 에브라임은 전쟁에 동참했고, 숙곳과 브누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므낫세 지파였던 기드온이 가까운 형제 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에게는 호의적이었으나 갓 지파인 숙곳, 브누엘에 대해서는 파벌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세속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나’와 ‘우리’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자들이 만들어갑니다. 이스라엘에도 이런 풍조가 만연했고, 그 결과 세속적 가치관과 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의 변질로 번진 세속화(8:18~35)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기드온은 전쟁이 마무리되자 세속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이방 나라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세습입니다.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가 다볼에서 죽인 ‘왕자들의 모습과 같은 사람들’(8:18)이 자신의 형제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보복합니다. 이는 기드온이 ‘왕 같은’ 존재가 됐음을 암시합니다. 또 아직 어린 아들에게 칼로 적장을 죽이게 시키고, 적장의 상징물을 차지하는 것도 전형적인 왕의 행동입니다(8:20~21).
 물론 기드온은 세습 왕조 세우기를 거부했고,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여호와이심을 천명했습니다(8:22~23). 그러나 그가 금귀고리를 걷고(조세 부과), 금 에봇을 만들어(상징물 제작), 자신이 사는 성읍에 두는(수도 지정) 행동은 모두 세상 왕들의 활동입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기드온의 말년은 이방 나라 왕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8:29~32). 많은 아내와 70명의 아들들, 첩, 그리고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됨’(8:32)이라는 표현은 모두 왕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기드온이었지만, 입으로만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여호와시라”고 했을 뿐, 정작 자신의 삶으로는 실천하지 못합니다. 결국 기드온은 이후 진행될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권력 찬탈로 얼룩진 세속화(9:1~57)
결국 이스라엘의 세속화는 절정에 이르러 세습 왕정 국가에서나 일어날 만한 일이 일어납니다. 세습 왕정 국가에서는 한 왕자가 다른 왕자들, 즉 형과 동생을 죽이고 왕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바로 그런 일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납니다. 기드온의 서자였던 아비멜렉이(8:31)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인 세겜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폭력배들을 고용해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9:1~6).
 겨우 목숨을 부지한 막내 요담이 그리심 산에서 외친 우화는 세속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9:7~21).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같은 사람들, 즉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 앞에서 우쭐대려고 하지 않기에 왕의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가시나무같이 피해만 끼치는 자가 왕이 돼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요담은 아비멜렉이 바로 가시나무이며,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이 세운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합니다.
 요담의 예언은 3년 만에 현실이 됩니다(9:22).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 중에 에벳의 아들 가알을 중심으로 하는 반 아비멜렉파가 나타난 것입니다. 스불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비멜렉은 가알이 이끄는 군대를 쳤을 뿐 아니라(9:34~40), 자신을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까지 무참히 죽입니다(9:41~49).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비멜렉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점령하려다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9:50~57).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맙니다.

 

우상 숭배에 기반을 둔 세속화(10:1~12:7)
이후 두 명의 사사들이 등장하고(10:1~5), 그들이 죽은 후 다시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블레셋과 암몬의 손에 파십니다(10:6~9).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듣지 않으시며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10:10~14).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습니다(10:15~16). 다만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역사의 배후로 이동하셨습니다.
 암몬이 요단 강 동편 길르앗을 공격해 오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길르앗의 장로들은 지도자를 직접 선택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불량배의 우두머리였던 입다입니다(11:1~3). 아비멜렉과 입다는 둘 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시지 않은 지도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폭력으로 권력을 쟁취한 왕이라면, 입다는 피지배자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세워진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이 모두 폭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입다가 ‘큰 용사’(11:1)가 아니었다면 길르앗 장로들이 그를 자신들의 ‘머리’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11:8~10).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한다면, 입다는 지도자의 역할을 상당히 잘 수행합니다. 말하자면 민주적으로 세워진 불량배 출신 입다는 폭력으로 왕이 된 귀족 출신 아비멜렉보다는 나았던 셈입니다. 입다가 암몬의 왕과 벌인 외교 협상을 보면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외교적 능력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12~28). 그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합니다(11:32~33). 이는 세상의 ‘왕’이라는 자들이 결국 ‘깡패 두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유능했던 입다는 세상의 왕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동까지 그대로 답습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암몬과 싸우면서도, 암몬의 신 그모스에게나 어울릴 만한 인신제사를 하나님께 서원하고 실행합니다(11:29~31, 34~40). 입다는 하나님을 우상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왕들이 입으로는 백성을 위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듯이 입다도 똑같이 행동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예전에 기드온에게 했던 것처럼 입다에게도 자신들을 싸움에 부르지 않았다는 트집을 잡는데(12:1, 참조 8:1), 입다는 기드온과는 달리 반응합니다.
 입다는 모든 이스라엘을 위해 싸운 사람이 아니라 ‘나와 내 백성’(12:2)을 위해 싸운 사람, 즉 ‘왕’이었고, 에브라임은 왕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의 악한 태도를 입다를 통해 심판하십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사사 에훗 시대에 자신들이 모압 군사들을 죽였던 방식(3:27~29)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12:5~6).
 이처럼 하나님께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으실 때에는 악인을 사용하시면서까지 또 다른 악인을 징벌하십니다. 암몬과 에브라임의 오만함은 길르앗 장로들에 의해 세워진 불량배 두목 입다를 통해 심판받았고, 회개한 이스라엘(10:15~16)은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세속화가 극도에 이른 이스라엘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세속화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사 삼손(12:8~13:25)
입다 이후 나타난 사사 입산, 엘론, 압돈의 사역 기간은 모두 길지 않았습니다(12:8~15). 이스라엘은 점점 더 세속화의 물결 속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블레셋의 압제 아래 들어가고 맙니다(13:1). 이스라엘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임신하지 못했던 마노아의 아내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소망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바쳐진 한 사람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13:2~7). 마노아와 그 아내가 경험한 일들은 기드온에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6:11~24), 아브라함과 사라(창 18:9~15), 그리고 야곱에게 있었던 일(창 32:29~30)까지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 힘쓰고 계셨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 백성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사사기는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할 기회를 얻는 은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사 시대와 같은 죄악과 우상 숭배가 없는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