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나실인의 정체성을 잊은 삼손(14~16장)
삼손은 이전의 어떤 사사들과 비교해도 출신 배경이나 능력 면에서 최고의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출생 전부터 하나남께 바쳐진 나실인으로 구별됐고, 여호와의 영을 힘입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해 홀로 블레셋 사람들을 상대할 정도였으며, 또한 그의 수수께끼나 노래를 볼 때 문학적 소양까지 갖췄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철저히 부패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실인의 정체성, 즉 거룩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은 자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했습니다(14:2). 이방 여인과의 혼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죄악입니다. 게다가 자신이 죽인 사자의 사체에 생긴 꿀을 먹는데(14:8~9), 이는 가족의 시체라도 접촉해서는 안 되는 나실인의 규례를 어기는 행위입니다(참조 민 6:6~7).
삼손은 나름대로 블레셋과의 ‘전투’를 수행하기는 합니다. 결혼식에서 낸 수수께끼로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인 것을 시작으로(14:19), 여우 300마리의 꼬리에 횃불을 매달아 블레셋의 농장을 초토화시킵니다(15:4~5). 또 장인과 아내에 대한 복수를 핑계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15:7~8), 레히에서 천 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입니다(15:15~16). 그리고 블레셋의 성읍인 가사의 성문을 통째로 떼어 헤브론 앞산 꼭대기에 가져다 놓아 블레셋의 권세를 조롱합니다(16:1~3).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임하셨을 때, 삼손 한 명은 모든 블레셋 사람보다 강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승리를 통해 이스라엘이 새롭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괴롭히는 일은 연거푸 성공했지만, 거룩함이 결여된 승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뭉치게 하지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삼손은 그저 한 명의 불량배로서 블레셋을 괴롭혔을 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은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삼손과 영원히 함께하시지 않았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에게 있어서 알면서도 제거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죄와 같은 존재입니다(16:4). 삼손은 들릴라의 위협에 대해 전혀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앞에 ‘번뇌하여 죽을 지경’(16:16)까지 됩니다. 결국 삼손은 딤나의 결혼식에서 수수께끼의 정답을 지키지 못했듯이(14:16~17), 들릴라로부터 자신의 비밀을 지키지 못합니다(16:17).
삼손은 나실인 법 중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것 외에는 지킨 규례가 없습니다. 부정한 것에 접촉하면 나실인은 그 머리카락을 밀어야 하지만, 삼손은 강제로 머리카락이 밀립니다(참조 민 6:9, 12). 결국 삼손은 알면서도 벗어나지 않았던 죄 때문에 두 눈을 잃고 자신이 성문을 뽑아버렸던 가사 성(16:1~3)에서 놋 줄에 매어 맷돌을 돌리는 처지로 전락합니다(16:21).
다곤 신전에서 맞은 삼손의 최후는 그가 거룩한 자로서 블레셋을 친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밀린 후, 삼손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나실인의 정체성인 거룩함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인 자들이 그가 이전의 모든 싸움에서 죽인 자들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16:30).
이는 만약 삼손이 처음부터 거룩한 자로서 블레셋을 쳤더라면 훨씬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셨으리라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사들 중 가장 유능했지만,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함이 없었기에 블레셋을 온전히 쫓아내는 데까지 이를 수 없었던 삼손.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영적 리더십의 부재(17~18장)
사사기는 처음부터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암시로 시작합니다(1:1~3). 그리고 사사기의 결론은 이스라엘에 영적, 정치적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에 대한 설명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왕이 없는 상태(17:6, 18:1, 19:1, 21:25), 즉 정치적 리더십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사사들의 사역은 한계에 다다랐고, 레위인의 종교적 리더십마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때 레위인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부잣집에 개인 제사장으로 취직하는 방랑자요(17:7~10), 첩을 맞이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전락합니다(19:1).
미가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미신적 우상을 섬기는 수준으로 추락한 당시의 영적 수준을 그대로 드러냅니다(17:13). 또한 단 지파의 뻔뻔한 태도와 그들을 따르는 레위인의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가 영적으로 부패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18:17~20). 이들의 신앙이란 주술에 불과했으며, 이 레위 제사장은 점쟁이나 무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무엇이 바른 신앙인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여호수아에게 할당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적이 없는 라이스의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칼로 치며 성읍을 불살라 그 땅을 차지합니다(18:27~29).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그저 땅을 차지하려는 정복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지파의 모습은 평화로운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 떼강도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 곧 강도짓의 성공은 미가에게서 빼앗은 신상을 세우는 우상 숭배로 마침표를 찍고 맙니다(18:30~31).
왕이 없는 백성(19~21장)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19:1, 21:25) 어떤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며 마칩니다. 미가와 단 지파 사람들이 행하는 일들에서 봤듯이 영적 리더십은 사라져 버렸고, 정치적으로 열두 지파를 이끌 사람 역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때문에 이스라엘이 경험해야만 했던 비극을 설명하며 막을 내립니다.
‘행음하고 도망간 첩을 데리러 장인의 집을 찾아가는 레위인’이라는 등장인물 자체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19:1~3). 그 장인의 집에서는 첩이자 딸인 여인의 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헤어지기 싫은 인간적 감정만 드러날 뿐입니다(19:4~9). 그리고 늦은 시간에 길을 떠난 레위인의 어리석음도 문제지만, 이방 족속인 여부스 사람들보다는 동족인 베냐민 사람들이 낫지 않겠느냐는 예상조차 빗나가는 모습은 한탄스럽기까지 합니다(19:15).
심지어 그날 밤 기브아에서는 소돔을 연상시키는 악행이 벌어졌으며(19:22), 이는 이스라엘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갑니다. 레위인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눠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냅니다(19:29). 이 역시 올바른 대처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하면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먼저 그 성의 장로들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 정상적인 사법제도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레위인의 호소를 들은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흥분했고,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징벌할 것을 결의합니다(20:8~10). 그런데 베냐민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20:13~14). 그들에게는 율법의 정의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함보다 자신의 파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몇 명의 불량배들을 처형하면 끝났을 일이 온 이스라엘의 내전으로 확대됩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전투에서 리더로 다시 유다가 지목됩니다(20:18, 참조 1:2).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던 가나안 족속의 자리에 베냐민 지파가 위치한 셈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전투는 여호수아의 아이 성 전투와 비슷한데, 당시 이스라엘이 아간의 범죄를 안고 전투에 임했다가 패배를 맛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베냐민에게 두 번이나 패배합니다(20:19~25). 베냐민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이 정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벧엘에서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이후에야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싸움에서 베냐민은 마치 옛적 아이 성 주민들처럼 패배하고 진멸을 당합니다(20:26~48).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에게 주지 않겠다고 맹세하는데, 이는 베냐민을 이방 민족과 같이 취급하겠다는 선언입니다(21:1). 이렇게까지 한 것은 명백한 과잉대처로서, 율법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로 바로잡지 않고 또 다른 잘못으로 가립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베스 길르앗 주민들을 쳐서 젊은 처녀들을 약탈하고, 실로의 여자들을 납치해 베냐민의 남은 600명에게 준 것은 범죄를 또 다른 범죄로 덮으려는 행위입니다(21:8~23).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맹세를 주술 정도로 여기고 있었습니다(21:18).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맹세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법을 마련해 두셨고(레 22, 27장), 잘못된 맹세를 지키는 것보다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맹세는 지켜야만 했기에 더 큰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는 미신, 주술, 우상 숭배의 결말입니다. 결국 그들의 절망적 상황을 확인하며 사사기는 끝이 납니다(21:25).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한 이후로(창 3:5),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소견’으로 선악을 판단하려고 시도해 왔으며, 현대에 들어서 이것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비극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세상의 흐름에 맞서 하나님께서 왕이시며 그분의 말씀만이 옳고 그름의 기준임을 인정하는 삶, 곧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사사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각자의 신앙을 돌아보는 10월을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