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5년 11월

같은 진리, 다른 적용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골로새서, 야고보서


복음, 그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신만의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면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지만, 어떤 사람은 장성한 후에 예수님을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능력, 성품이 모두 다르기에 영적 전투의 양상도 각자 상황에 따라서 상당히 다릅니다. 간혹 이 때문에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우리가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11월에는 바울이 쓴 골로새서와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를 통해 같은 복음이 어떻게 다르게 적용되는지를 살피고, 각자에게 주어진 영적 전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진리 가운데 거하라(골 1~2장)
골로새교회는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배운 에바브라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세워진 교회입니다(1:6~7). 그래서 골로새서의 첫 부분에는 골로새교회에 복음이 열매를 맺고 있다는 소식에 대한 바울의 기쁨이 드러납니다(1:1~12). 
하지만 골로새교회는 대부분 이방인 성도로 이뤄진 교회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방 종교나 세속 철학 등에 의해 진리가 왜곡되거나, 아예 종교적인 껍데기만 남을 위험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초신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에, ‘진리’ 즉 ‘하나님을 아는 것’(1:9~10)이 시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개관하고 있습니다(1:13~23).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하나의 종교를 새롭게 믿게 됐다’, ‘새로운 가르침을 얻었다’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변화가 아닙니다. 더 이상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않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는 의미입니다(1:13). 이제 황제나 기타 권세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게 됐습니다. 군대의 힘으로 만들어진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1:20).
복음 전파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해 이 세상을 정복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하며,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1:24~29).
문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그저 세상 철학이나 종교 수준으로 이해하고 교묘한 말과 철학,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을 가르쳤다는 점입니다(2:4, 8). 또한 복음을 유대교의 한 종파 정도로 여겼던 자들은 유대교의 종교 행위를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2:16~19).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고, ‘세상의 초등학문’(2:20)에 지나지 않는 껍데기들에 휘둘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새로운 삶 속으로(골 3~4장)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이전의 삶과 정체성을 떠나 새로운 삶과 정체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고(3:1~2, 5),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을 입으며(3:9~10), 차별이 없고 오직 사랑과 평강이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에 들어가야 합니다(3:11~15). 이는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 등 세상의 모든 질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법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3:18~4:1).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자신도 이런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살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빌레몬에게서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4:9, 참조 몬 1장), 바나바와의 갈등의 근원이던 마가와 화해했으며(4:10, 참조 행 15:36~40), 자신을 늘 괴롭혔던 유대인, 즉 할례파인 유스도와도 함께 사역하는 일이 벌어집니다(4:11). 이처럼 복음은 삶의 방향성을 바꿔 놓는 강력한 능력입니다.

 

아는 것을 행하라(약 1~2장)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라. 너희 왕이 바뀌었다. 너희는 이제 새로운 나라에 속하게 됐으니 새로운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면, 예수님의 동생 사도 야고보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너희가 아는 대로 행하라”는 실천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와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는, 오늘날의 모태신앙인이나 신앙 연륜이 깊은 성도들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바울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한 것과 같은 근본적 세계관의 변화에 대한 요구를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은 자신들이 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2:2), 율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야고보서는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이전에도 많은 고난을 당해 왔기에 야고보서 역시 고난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로 시작합니다(1:2~18). 그러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영적 매너리즘과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유대인 성도들이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대로 실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함을 강하게 지적합니다(1:22~27).
첫째는 재물이나 지위를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행동이었습니다(2:1~13). 이는 기존 유대교에서 지속된 것으로, 이미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악습입니다(참조 마 23장). 야고보도 이를 비판하면서 그것이 율법을 어기는 행위임을 강조합니다(2:8~13). 유대인들은 마치 생명과도 같이 율법을 중요시했지만 정작 그 율법대로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오직 믿음’을 가르쳤지만, 야고보는 율법을 강조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것, 즉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2:17). 유대인들이라면 매일 암송하며 고백하게 마련인 “하나님은 한 분이심”(신 6:4)에 대한 믿음은 귀신들도 믿고 떠는 것이라고 큰소리로 부르짖은 후,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을 제시하며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4)고 말하며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이 야고보와 바울의 메시지가 서로 배치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다만 청중이 다를 뿐입니다. 바울의 청중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할례도 받아야 하고, 율법 지식도 있어야 하고, 율법의 크고 작은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휘둘릴 수 있는 초신자 이방인들이었고, 야고보의 청중은 교리를 확실히 알고 있지만 삶에서 실천하는 것에 주저하는, 오래 신앙생활을 한 유대인들이었기에 강조점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한 것이라면,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대로 말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선 자들에게 주는 권면(약 3~5장)
둘째로 야고보는 교회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가르침을 줍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 생활을 할 경우, 아무래도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성경에 익숙한 유대인들이 영적 리더십을 소유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3:1) 즉 유대인들을 경계하면서 언어생활에 조심할 것을 강조합니다.
말실수의 문제는 이를 작은 일로 치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야고보는 언어, 즉 혀를 말의 재갈, 배의 키, 작은 불 등에 비유하며 이것이 ‘작지만 큰 결과를 일으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3:2~5). 말은 큰 파괴력을 갖고 있고(3:6~8), 악한 말을 일삼던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며, 지혜로운 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선행으로 그 행함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시기와 다툼, 혼란이 있을 뿐입니다(3:9~16).
이어서 야고보는 교회의 다툼 문제를 다루는데(4:1~12), 사실 교회의 다툼은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생깁니다. 그들이 정욕과 욕심에 붙잡혀 교만한 태도를 갖게 되면 교회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렇기에 야고보 사도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라고 권면합니다(4:10). 특히 입법자와 재판관 등 지도자의 경우, 율법으로 다른 형제를 판단하고 재판하려는 태도가 많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심판자라며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4:11~12).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부유한 자들에게 상당히 강한 어조로 경고합니다(4:13~5:6). 이는 교회가 세상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오직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며 거룩함을 지키고 인내하는 공동체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결론(5:7~20)은 서두와 같이 시험을 당할 때 인내하라는 가르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원망하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기도를 통해서 그들 가운데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미혹된 사람을 이끌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진리를 청중에 따라 다른 메시지로 전합니다. 이렇게 관점이 다른 메시지가 기록돼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진리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내 삶을 성찰하는 데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내가 지금 직면한 영적 도전이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음에서 오는 것인지 묵상하는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 주님의 복음이 온전히 뿌리내리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