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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하나 됨과 거룩함을 위한 원리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교회 역시 죄인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파벌과 반목, 경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또 세상의 영향력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함을 지켜나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못할 때 많은 성도가 상처를 받고 복음 전파에도 상당한 장애가 됩니다.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를 통해 어떻게 하면 교회가 하나 되고, 또 일상적인 삶 가운데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1~2장)
바울은 서두에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거룩’하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며(1:2),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자들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1:9). 이는 고린도교회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교회이기에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교회는 크게 네 파로 갈라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지도자)을 따르느냐가 나뉨의 기준이었습니다(1:12). 결국 “누가 더 잘 가르치느냐”, “누가 더 능력이 있느냐”라는 논쟁에 의해 교회가 갈라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가진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우선 ‘바울파’를 강한 어조로 꾸짖습니다(1:13~16). 그리고 어떤 지도자가 더 지혜롭고 더 큰 능력을 가졌느냐는 논의 자체를 책망합니다.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랑은 헛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것들을 사용하시는 분이기에 세상의 강하고 높은 것 역시 헛된 것입니다(1:18~31).
어떤 지도자의 가르침이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리석고 설득력 없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지혜로운 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2:4~5). 물론 이는 지도자를 분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참된 가르침은 성령의 지혜에 의한 것이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냐, 저 지도자가 참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영적인 기준으로 분별돼야 합니다(2:13~15).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로(3장)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파로 나뉘어 ‘누가 더 낫냐?’며 갈등하는 모습을 어린아이로 비유합니다(3:1~3). 바울과 아볼로 등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입니다. 바울은 이 협력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건축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터를 닦았고, 그 터 위에 아볼로를 비롯한 여러 성도들이 건축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3:10). 성도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마지막 날의 불 시험 앞에서 자신의 공적이 남아 있을 것이냐 여부지, 다른 이들보다 얼마다 더 크거나 아름다운 재료로 건축에 기여했느냐의 여부가 아닙니다. 
바울은 다시금 세상 지혜를 따르지 말라고 하는데(3:21), 이는 세상은 남들보다 높아지고 강해져서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것이 네 것보다 낫다”며 싸우는 어린아이와 같은 세상의 어리석음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다 주어져 있음을 깨달을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3:21~23).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으로(4장)
참된 일꾼을 분별하려면 그가 얼마나 낮아짐에 익숙한지를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때 그의 인간적 능력이나 언변, 또는 외모 등에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4:13)처럼 됐다며 세상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4:16). 이는 자신처럼 낮아지고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해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만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기를 멈추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거룩함을 유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지식과 언변으로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4:20).

 

분리됨이 아니라 거룩함으로(5~6장)
교회가 하나 돼야 한다는 말은 죄를 범한 자들까지 포용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가운데 음행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왜 쫓아내지 않았냐고 책망합니다(5:1~2). 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에는 불신자들을 대할 때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음행이 워낙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만약 모든 음행하는 자들과 관계를 끊는다면 세상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어야 할 정도였습니다(5:10). 그러나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면 안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5:12~13).
바울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소송 문제를 다루면서 세상 가운데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의 지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권세를 갖고 세상을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6:2~4).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이의 다툼을 세상 법정에 갖고 간다는 것은 결국 세상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보다 상위에 있다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보내신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분리돼도, 세상과 같아져도 안 됩니다.

 

거룩1, 부름 받은 그 자리에서(7장)
7장부터는 고린도교회에서 질문한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평범한 일상의 거룩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울은 분명 독신으로 살면 결혼한 사람에 비해 더욱 하나님을 섬기기에 편리하다고 말합니다(7:29~34). 그러나 결혼 여부는 거룩함과는 관계가 없는 자유의 영역에 속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음행의 문제가 있다면 결혼하는 것이 좋으며, 결혼한 자들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7:1~5), 또한 독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다고도 말합니다(7:7~8). 그러면서도 이것이 법이 아님을 강조합니다(7:6, 25~26, 35). 각자의 부르심이 다르기에 그 부르심대로 행하라는 말입니다(7:7).
결혼에 있어서 둘째 문제는 불신 배우자와 헤어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 6:14)고 가르쳤고, 유대인의 역사에는 이방 민족과 결혼한 자들로 하여금 아내와 헤어지도록 조치한 일도 있기에(스 9~10장) 불신 배우자와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불신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한 헤어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7:10~15). 만약 불신 배우자와 헤어져야 한다면 회심 이전에 결혼한 사람은 무조건 이혼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독신자가 결혼할 때에는 주 안에서 하는 것이 옳습니다(7:39). 그러나 믿음 때문에 기존의 가정을 깨뜨리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룩함을 지키는 중요한 원칙 하나는 바로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7:20, 24).

 

거룩2, 사랑을 따르는 자유의 포기(8~9장)
고린도 지역에는 우상 숭배가 성행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 유통되고, 불신자의 집에서 대접받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분명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즉 그 제물을 먹는 것이 우상 숭배도 아니고, 신앙을 잃을 이유도 없습니다(8:4~6). 그러나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형제들이 교회 내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 그것을 먹는 것은 자유이며, 먹어도 된다는 것이 바른 지식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약한 형제를 실족시킬 수 있기에 바른 지식에 근거한 정당한 권리라 하더라도 형제를 위해 사랑으로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칩니다(8:9).
이는 바울이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얼마든지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9:4~6).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포기했는데, 그것은 오직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9:12).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도 자유인의 권리, 사도로서의 권리인 생활비까지 포기했는데, 너희는 단지 우상 제물을 먹을 자유 하나를 포기할 수 없느냐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돼서 그들과 함께하기를 선택했습니다(9:20~22). 마찬가지로 고린도의 성도들도 지식보다는 사랑을 따라서, 약한 자들과 함께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는 사람, 형제들과 동역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사람,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리를 지키면서도 늘 다른 이들을 배려해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공동체, 이런 교회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