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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새 이스라엘이 일어나다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사도행전은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다룬 여호수아서와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침공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서가 물리적 전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드러냈다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한 영적 전투로써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굴복시켜 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새 이스라엘이 세상을 어떻게 정복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는 그 새 이스라엘을 ‘교회’라 부릅니다.


증인들에 의해 확장되는 새 이스라엘(1장)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1:3). 제자들이 질문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1:6)은 사도행전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제자들이 생각했던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1:8)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보여 주는 단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세속 국가들처럼 ‘용사’들에 의해서 확장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새 이스라엘은 용사들이 아니라 ‘증인’들에 의해서 확장되는 나라입니다.
120명의 무리가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맛디아를 뽑아 12사도를 회복한 것은 교회가 이스라엘 12지파를 계승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1:15~26).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예루살렘에서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이 아니라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에 근거하는 나라, 증인들의 영적 전투에 의해 확장되는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부여받은 새 이스라엘(2장)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은 모두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성령의 임재가 따랐습니다(삼상 10:1, 10, 16:13). 성령 받음은 곧 기름 부음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헬라어로는 ‘그리스도’입니다. 오순절에 교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예수님을 대리하는 새로운 그리스도가 됐습니다.
그들이 각 곳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전한 것은 교회 곧 새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한 민족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2:4).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으셨음을 선포합니다(2:14~36).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권인 다윗의 왕권이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회복됐으며, 그 왕권이 이제 교회에 의해서 발휘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베드로의 선포 앞에 마음이 찔린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며 교회의 일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던 것과 같은 역사가 재현됐습니다(참조 눅 3:7~14). 그들은 세상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갖게 됐습니다.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형태의 새로운 나라가 출범한 것입니다(2:41~47).

 

종교 기득권을 넘어선 새 이스라엘(3~5장)
본격적으로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영적 전투가 벌어집니다. 첫 전투의 대상은 유대교의 종교 기득권자들이고, 전투 장소는 성전, 그중에서도 ‘아름다움의 문’입니다. 화려한 성전의 ‘아름다움’인 그 문 앞에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한 사람이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화려함은 그 사람에게 그저 하루 먹을 양식을 구걸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3:1~2).
그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음을 꿰뚫어 보고, 그를 도전하며 일으켰습니다. 날마다 그 앞에서 구걸했지만 그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자가 드디어 그 문을 통해 성전으로 걸어 들어가게 됐습니다(3:6~8).
이 사건은 죄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고,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기적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인으로 지목해 죽인 예수야말로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선포합니다(3:12~26).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있었다면, 성전에서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폭력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4:3).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사도들을 위협하는 것 외에는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 전역에 자신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4:16~22). 그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사도들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위협만 할 뿐이었습니다(4:19~21).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는 바로 주님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다시 성전으로 이끌어 거기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한 기적입니다(5:17~26).
사도들은 다시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그때도 그들의 말은 동일했습니다. 사도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했습니다. 이런 사도들 앞에서 종교 기득권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위협과 폭력 외에는 없었습니다(5:33, 40).
이 가운데 랍비 가말리엘의 발언은 상당히 큰 중요성을 갖습니다(5:34~39). 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대적할 수가 없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절로 무너질 것이니 교회를 대적해 싸울 이유가 없다는 그의 말은 지혜로운 판단인 동시에 교회에 대한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습니다. 공회의 결의로 십자가형을 당한 그 예수가 부활했으며, 그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 아무 대처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는 승리했습니다. 교회는 더욱 강해졌고, 세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각오를 다지게 됐습니다(4:24~31). 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누구도 재물을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자 없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됐으며, 그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정도였습니다(4:32~35).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마치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정복하는 이야기 사이에 아간의 배신으로 결국 그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삽입돼 있듯이(참조 수 7~8장), 교회가 종교적 기득권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이야기(3:1~4:31, 5:17~42) 사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교회에 거짓말을 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삽입돼 있습니다(5:1~16). 이는 하나님께서 아간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게 주어진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쳤노라고 거짓말을 한 데 있었습니다. 이는 성령을 속이는 행위로 사도의 엄중한 책망 앞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지닌 성령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하면서도 두려운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유대 문화를 넘어서는 새 이스라엘(6~7장)
새 이스라엘, 교회의 영향력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충만하게 됐을 뿐 아니라 더 이상 거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오셨고 유대인들로 사도를 삼으셔서 교회를 세우셨지만, 복음은 그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헬라 세계에까지 번져갔습니다. 이 일에는 유대인 교포, 즉 유대인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헬라어와 헬라 문화에 좀 더 가까웠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용됐습니다.
교회가 헬라 세계를 정복해 가게 된 계기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이었습니다(6:1). 이에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던 사도들은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일곱 집사를 세워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으로 미뤄 볼 때 그들 모두 헬라파였는데(6:5), 이들은 단지 교회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세력과 영적 전투를 수행했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성전의 기득권에 맞서 영적 전투를 벌였다면, 헬라파 유대인이던 집사들은 주로 소위 ‘자유민’, 즉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헬라파 유대인들과 주로 논쟁하며 영적 전투를 벌였습니다(6:9). 그중에서도 스데반의 은혜와 권능은 특히 뛰어났습니다(6:10, 15).
스데반은 공회에 끌려갔지만 두려움 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되짚어가며 복음을 변론합니다(7:2~53). 그의 논지를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 등 선지자들을 보내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에 보내셨으나, 그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핍박했던 것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따른 자들은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공회에 모인 자들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모습과 거의 일치합니다(7:59~60, 참조 눅 23:34, 46). 그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해 예수님과 같은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께서는 그 다음 주자를 그 자리에 준비해 두셨습니다(7:58). 그를 통해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을 뿐 아니라 땅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로 교회는 세상을 정복해 왔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권세들이 교회를 통해 드러난 성령의 권세 앞에 굴복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자들에 의해 이어져 옵니다. 새 이스라엘, 교회의 승리를 묵상하며 우리 각자의 삶 가운데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