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모든 가정이 주님의 복을 힘입어 번성하길 기도합니다.
각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도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원래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 가운데 믿음의 세대가 연결돼 은혜로 충만한 가문이 세워지고, 그 가문들이 모여 지파를 이룬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탄의 권세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섬기는 가정과 교회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와 가정은 공격 속에서도 더욱 강성해지며
각종 장벽을 뛰어넘고 무너뜨리며 번성해 갑니다.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어(8장)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온 땅을 통치하는 왕으로 등극하시는 발판이 됐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과 함께했던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예루살렘교회를 박해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지는 계기가 됐습니다(8:1).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순교한 스데반처럼 제2, 제3의 ‘작은 예수’들이 세상에 퍼져 나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를 시작으로 유대와 사마리아에까지 퍼져 나간 복음은 당시의 사회적 장벽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같이 대하는 사이였으나,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집사 빌립은 마치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사마리아에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쳤습니다(8:5~8).
그뿐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혹하며 자칭 큰 자라 하던 마술사 시몬마저 성령의 권세 앞에 굴복했습니다.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했다가 베드로로부터 저주를 받고 그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복음의 권세가 마술적인 종교의 권세와 돈, 즉 맘몬의 권세까지도 모두 정복했음을 보여 줍니다(8:9~24).
증오의 장벽을 뛰어넘어(9:1~31)
교회를 핍박하는 사탄의 권세가 치명타를 입은 사건은 바로 사울의 회심입니다(9:1~31). 위협과 살기등등한 기세로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오히려 앞장서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가 됐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9:10~16), 주님께서는 사울이 교회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끼쳤는지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택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비롯한 여러 성도들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 사울에게 보복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보복은 증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택하심으로 이뤄집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의 증오를 사랑으로 덮으심으로써 주님을 위해 ‘고난 받게’ 하셨습니다(9:16). 그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 그가 죽이고 핍박했던 성도들을 대신해 고난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땅에 엎드러지고(9:4),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9:9),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은 후 다시 눈을 뜨고 강건해진 것은(9:17~19) 그가 성령 안에서 ‘엎드러져’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바로의 왕궁에서 모세를 자라게 하셨고, 초대 교회 시대에는 교회를 앞장서서 핍박하던 자를 붙잡아 목숨 다해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장벽을 뛰어넘어(9:32~11:30)
세상에는 교회의 번성을 막을 만한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는 유대인과 그들을 비웃고 멸시하던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너무나 견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 쓰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서 히브리파 유대인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로마의 백부장이던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풂으로써(10:34~48),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역시 구원하신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선포됐습니다(11:18).
당시 유대인 출신 제자들의 눈에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어기고 바른 신앙의 길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였습니다(11:1~3).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2의 예수’로서 권능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룻다에서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치고,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권능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셨던 이적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9:32~43). 결코 성령께서 베드로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환상과(10:10~16), 성령의 말씀으로(10:19~20) 인도하셔서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도록 이끄셨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반복하며,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11:5~17).
복음은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도시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인의 도시 안디옥이 교회의 새로운 거점이 됐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11:26). 새로운 정체성 아래 이방인 성도들이 유대인 성도들을 ‘형제’로 여기며 힘을 다해 어려움을 당한 유대인 형제들을 돕는 연합이 일어납니다(11:27~30).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분이 무의미해졌습니다. 문자에 매여 있던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입니다.
정치권력의 압제를 뛰어넘어(12장)
폭압적인 정치권력도 교회의 번성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헤롯에 의해 무교절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12:1~2). 예수님께서 유월절(무교절) 어린양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스데반이 십자가 위의 예수님같이 순교한 것처럼, 야고보 사도도 무교절에 거룩한 제물로 바쳐집니다. 베드로도 체포당해 옥에 갇혔습니다(12:3~4).
그러나 이런 정치권력의 폭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교회가 하나 돼 기도하게 하셨고, 그 기도의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베드로를 옥에서 이끌어 내고, 그를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집으로 인도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는 기도하면서도 막상 응답을 확신하지 못했던 교회에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12:5~17).
교회를 핍박했던 권력은 결국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자멸합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이 마치 신과 같은 힘과 능력을 가진 양 교만하지만 주의 사자가 치면 헤롯처럼 벌레의 먹잇감에 불과합니다(12:20~23).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며, 교회는 어떠한 압제에도 불구하고 번성합니다(12:24~25).
제1차 전도여행(13~14장)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는 사울(바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성령님께서 어떻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 가셨는지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처음에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의 파송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는데, 이들의 여행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셨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며 수많은 군중들에게 표적을 보이셨던 것처럼,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섬으로 가서 거기 있는 여러 회당을 돌며 복음을 전하고 마술사를 제압합니다(13:5~12).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전한 말씀(13:16~41)의 논지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저주를 받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다윗의 왕권에 대한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를 믿는 자는 썩음(죽어 영원히 사라짐)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선포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실 후손이 오셨다는 것이므로, 그 초점이 유대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인들에 의해 거부됩니다(13:45).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받지 않았기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노라고 선언했고, 이에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믿는 일이 일어납니다(13:46~48). 이는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 의해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다른 지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일과도 매우 흡사합니다.
이고니온에서 허다한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난 바나바와 바울은(14:1~7),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믿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하기도 했습니다(14:8~18). 이는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행했던 일(행 3:1~12)과 매우 흡사합니다. 또 이고니온에서 바울이 돌에 맞고 죽은 것 같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성에 들어간 것도, 스데반이 죽임을 당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집사들에게 일어났고, 또한 그 일들이 바울의 선교여행 가운데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사도들의 삶 가운데 동일하신 예수님의 영,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사탄의 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습니다. 그 공격은 종교로, 민족적 편견으로, 정치적 폭력으로 또는 기타 여러 모습으로 다양하지만, 성령께서 거하시는 가정,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번성합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초대 교회의 번성을 묵상하면서, 주님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결코 쇠하지 않고 번성하리라는 믿음을 갖는 5월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