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롬 1:16).
이는 바울이 실제로 체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따라 전파되는 과정에 자신은 다만 도구로 사용됐음을 깊이 체험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 사역은 그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는 차원으로 확장됐습니다. 6월에는 성령께서 바울을 어떻게
이끌어 가셨는지 뒤따라가며 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지, 그리고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15장)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13~14장)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로마 전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오셨음을 전하려 했기에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뿐만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실로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돼야 하는가? 할례를 받고 율법의 각종 요구들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가? 예수를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인가, 유대인이 돼야 구원을 얻는 것인가?” 예루살렘에서는 이런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집니다(15:7). 그리고 이 논쟁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에 의해서 종결됩니다. 결론은 “유대인이 돼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함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15:11).
예루살렘 공의회는 ‘복음은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인정합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또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느냐 아니냐가 구원의 기준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이로써 복음은 유대교와 율법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온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16~17장)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다투고 따로 팀을 꾸린 바울은(15:36~41), 아시아로 가려던 그의 계획을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빌립보에 도착합니다(16:1~12). 지금까지 회당을 돌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이번에는 회당조차 없는 이방인의 땅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복음은 회당에서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임시로 기도할 곳을 찾기 위해 간 강가에서(16:13~15),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가 억울하게 갇힌 감옥에서(16:16~40), 그리고 아덴에서는 우상이 가득한 ‘아레스(전쟁의 신)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오바고에서(17:16~34) 전파됐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퍼졌습니다.
물론 바울은 회당이 있는 곳에서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 어려움을 겪었지만(17:5,13),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열매를 거뒀습니다(17:1~15). 이처럼 복음은 회당에서든지 우상들에 둘러싸인 이방인의 토론장에서든지 전파됐고, 그 가운데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했습니다.
민족과 문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18장)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들어갑니다(18:1).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고 실라, 디모데와 재회하며 힘을 얻고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에 직면한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 전하기를 포기하고 회당 옆집이었던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옮겨서 복음을 전합니다(18:4~7).
정작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의 반발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없었는데, 회당 옆집에서 복음을 전하자 회당장과 수많은 이방인이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18:8). 유대인들의 극렬한 반대를 생각한다면 회당장의 회심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고린도의 세속적이고 음란한 문화를 고려한다면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의 회심은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18:10)고 하시며 그곳에서 1년 반을 사역하게 하셨고, 큰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민족과 문화의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전파됐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바울 일행은 고린도를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은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나게 하심으로써 바울이 떠난 아가야(고린도)에서 바울 일행을 대신해 사역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제2차 전도여행을 마감하며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에베소 사역을 필두로 하는 제3차 전도여행을 준비합니다(18:19~21).
세상을 변혁하는 예수님의 능력(19장)
3차 전도여행의 주요 거점은 에베소였습니다. 사실 에베소는 이교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마치 예수님께서 유대와 갈릴리에서 하셨던 것처럼 사역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 다음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자로서 사역하셨듯이,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을 알던 사람들에게 와서 주 예수의 이름을 알리고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숫자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12명쯤 됐습니다(19:1~7).
회당에서는 바울도 예수님처럼 배척당했지만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복음을 전해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19:8~10). 예수님처럼 바울도 놀라운 이적을 행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던 것처럼, 바울의 사역을 따라하려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악귀도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라는 말로 바울을 인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마술 책을 모아 사람들 앞에서 불태우기까지 했습니다(19:11~20).
에베소에서 바울이 품은 마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품으셨던 마음과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결심하셨던 것처럼(눅 9:51),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작정하고 그 이후에는 로마까지 가겠다는 마음을 품습니다(19:21).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은 바울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흑암의 세력, 곧 이방 종교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데미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들이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벌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떠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습니다(19:23~41).
예루살렘을 향해, 예수님처럼(20~21장)
바울은 적대적인 유대인들을 피해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 드로아로 들어갑니다.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밤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을 뿐 아니라 사고로 다락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려내기까지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능을 온전히 힘입은 사역이었습니다(20:8~12).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만나 자신이 왜 지금 예루살렘으로 향하려 하는지를 밝힙니다(20:18~35). 예수님께서 자신의 앞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음을 아셨음에도 그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듯이, 바울 또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주 예수께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20:23~24).
또한 바울은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며 십자가 고난을 예언하셨던 것처럼(눅 9:22, 44),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만난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당하고 죽을 것까지도 각오했다고 고백합니다(21:3~4, 11~13).
바울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문제를 일으키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만난 야고보와 장로들은 유대인 중에 믿는 자들에게까지 바울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퍼졌음을 알리며 오해를 풀기 위해 나실인의 결례를 행하라고 제안합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바울이 율법을 온전히 따르는 유대인임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습니다(21:20~25). 사실관계를 따진다면 바울이 굳이 그들의 말에 따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의 분란을 피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기꺼이 하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었고, 결례를 행하며 비용을 지불했습니다(21:26).
하지만 모든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에 대한 오해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주장하며 바울을 끌어내 죽이려 합니다(21:27~30). 이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 역시 성전과 연계돼 있음을 기억하게 합니다(눅 19:45~48).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일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권세자들에 의해 로마 권세자에게 넘겨져 십자가 형벌을 당하셨지만, 바울은 유대인 군중들이 죽이려 할 때에 로마 권세자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됩니다(21:31~34). 비록 쇠사슬에 묶였지만 바울은 마치 왕이나 장군이 군대의 호위를 받듯이 영내의 층대로 호송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이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왕이나 귀족이 연설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21:35~40). 주님께서 군중들의 정죄를 받으셨으나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높임을 받으신 것처럼, 바울도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를 통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이방 사회에 들어가 사람들을 구원한 것도, 우상을 숭배하던 지역을 변혁한 것도 모두 그가 원래 의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에 충만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던 그를 통해 세상의 모든 장벽은 무너지고 우상이 파괴됩니다. 또한 그는 비록 세상이 깨닫지 못할 방법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 높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해 하나님의 손에 들린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