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2015년 07월

세계를 통치하는 새 이스라엘, 교회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날샘> 디렉터)

4월호에 사도행전 묵상을 시작하면서 밝혔듯이, 사도행전은
성령에 붙잡힌 복음의 증인들이 영적 전투를 통해 세상을 정복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성읍들을 하나씩 점령해 갔듯이, 예수님께서도
각 성읍을 다니시며 그곳을 다스리던 악의 영을 쫓아내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 곧 예수님의 영에 붙잡힌 사도들도 각 성읍을 다니며
사망과 죄악의 권세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마지막 주자인 바울은
로마제국의 각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고,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종교, 정치 지도자들과 일전을 벌인 후, 로마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와 대결(22~23장)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 종교의 중심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영적 전투를 벌이셨듯이, 바울도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과 일전을 벌입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개종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이루셨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껍데기만 남아 있던 유대교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따라온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정통 유대인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실로 바울은 ‘뼛속까지 유대인’이었습니다(22:3~5). 그리고 자신이 유대교를 떠난 것이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즉 실제로 자기 두 눈으로 보고 온 몸으로 체험한 바를 전하는 것이라고 증언합니다(22:6~11).
바울의 눈을 뜨게 한 사람도 경건한 유대인 아나니아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대제사장과 이름이 같았습니다(22:12, 23:2). 바울은 아나니아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그 의인(예수님)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다”(22:14)고 증언하는데, 이는 모두 철저한 유대교식 표현입니다. 예수 부활의 복음은 결코 이단 사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자, 유대인들은 폭발하고 맙니다(22:22~23). 종교의 껍데기만 남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그저 부정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회로 모인 재판정에서도 율법에 근거한 합당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23:1~10).
바울은 정말 중요한 사실은 자신이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느냐 아니냐 등의 종교적 외형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소망, 곧 부활이라는 점을 일깨웁니다(23:6).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고, 그 사실을 증언하며 사역해 왔습니다. 그는 성전이나 율법을 부인한 적이 없으며, 다만 유대인의 소망이 실현됐음을 목격했고 이를 전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이 문제에 집중해 주기를 바랐지만 유대인들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며 소동을 일으킬 뿐이었습니다(23:7~10). 그들의 관심은 성전, 혈통, 파벌 등에만 집중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보호한 것은 ‘로마 시민’이라는 그의 정체성이었습니다(22:25~29, 23:22~35). 바울을 붙잡은 천부장은 그리 정직한 사람은 아니었지만(23:27), 바울의 생질로부터 암살단에 대한 정보를 듣자 바울이 로마법에 따라 재판을 받도록 긴밀하게 움직였습니다(23:16~24).
이에 비해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는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만큼도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군중이 막무가내로 사람을 죽이려 하고, 율법대로 재판해야 할 대제사장은 죄도 정하지 않고 바울을 치라고 했으며(23:2~3), 극단주의 광신도들에게서나 나타날만한 살인 결사대까지 조직된 것(23:12~15)만 봐도 그들은 이미 이 천부장이나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을 섬기던 자들만도 못했습니다(참조 19:23~41).

 

가이사랴 권세자에게 복음 전도(24~26장)
‘가이사의 땅’이라는 그 이름대로 가이사랴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로마제국의 정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고발에 의해 로마 총독 빌라도와 헤롯 왕 앞에 서셨듯이(참조 눅 23:1~12), 바울도 가이사랴에서 대제사장의 고발에 의해 로마 총독과 유대의 왕을 만나 복음을 전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와서 바울을 고발했는데(24:1~9), 바울은 이를 계기로 총독 벨릭스 부부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습니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자신이 실정법을 어긴 것이 없음을 주장하며(24:11~13, 16~20), 다만 한 가지 부활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밝힙니다(24:15, 21). 비록 벨릭스가 정직한 자가 아니었기에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더 구류생활을 해야 했으나 이를 통해 벨릭스는 복음을 듣고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24:22~27).
바울은 벨릭스의 후임으로 부임한 총독 베스도에게도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 의해 고발당했는데, 베스도에게 인사 온 아그립바 왕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습니다(25:13).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법을 어기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다시 가서 재판을 받지 않겠느냐고 제의하는데(25:14~20), 바울은 이를 거절하고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합니다(25:9~12). 이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를 봐야 한다고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23:11).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인 문제에 대해 잘 알 수 없었던 베스도는 그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분봉왕 아그립바를 대동해 다시 바울의 재판을 엽니다. 아그립바 왕(헤롯 아그립바 2세)은 사도 야고보를 죽인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입니다(참조 12:1~2). 바울은 다시 자신이 유대인임을 강조한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을 증언합니다(26:4~23). 이는 예루살렘에서 군중 앞과 공회에서 한 증언(22:3~21, 23:6)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고대해 왔던 부활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졌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26:6~8).
총독과 왕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는 바울에게 베스도는 미쳤다고 했고, 아그립바는 바울을 제지했지만, 바울은 그 앞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6:29)라고 말합니다. 이에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던 것처럼(눅 23:1~23), 아그립바와 베스도도 바울의 죄를 찾지 못합니다.

 

광풍 속에서 발휘된 권세(27:1~28:16)
이탈리아로 향하는 배에 오른 바울은 미결수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상을 다스리는 참 권세자로 삼으십니다. 바울과 함께한 죄수들을 감독하는 사람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율리우스)였습니다(27:1). 그의 이름은 가이사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 천하로 호적하라 명령했던 가이사 아구스도(눅 2:1)의 이름에도 ‘율리우스’가 들어갑니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Augustus). 그는 바울에게 상당히 친절했지만, 배를 운행함에 있어서는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27:3, 11). 
율리오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린 배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생명도 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27:14~22). 이 표류하는 배 위에서, 바울은 죄수가 아니라 오히려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을 지휘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군인들을 지휘해 사공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했으며,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고, 그 배에 탄 276명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돼 결국 전원 모두 구조될 수 있게 합니다(27:21~44). 바울이 발휘한 예수님의 권세는 사람을 죽이는 폭력이 아니라(27:42) 생명을 구원하는 힘이었습니다.
멜리데에서 독사에게 물려도 상하지 않고, 병자에게 안수해 병을 고치는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제자가 어떤 권세를 갖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28:1~10).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한 명의 미결수지만, 그는 로마의 황제도 갖지 못한 온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권세는 바울을 감금하기보다 오히려 그를 호위하는 모양새입니다(28: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한 바울을 통해 온 땅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드러내 보이십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교회(28:17~31)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마치 미완성으로 남겨진 것 같지만, 실은 누가 자신이 경험한 역사에 대해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로 더 이상 혈통적 이스라엘, 곧 유대교가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접붙여진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말씀에 철저히 근거해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 중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28:23~24). 사실 이런 현상마저도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자리에 이방인들을 부르셨습니다(28:25~28). 이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구성돼 온 땅을 다스리는 자들이 됐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이 아닌 로마에서, 성전이 아닌 셋집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담대하고 거침없이 가르칩니다(28:31).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제사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임합니다. 처음 성령께서 성전이 아닌 다락방, 곧 집에 임하셨던 것처럼(1:13, 2:1~2),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로마의 한 셋집에 임했으며, 제자에 의해 그 나라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에 붙잡힌 제자들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말씀과 성령에 충만했던 베드로, 스데반, 빌립, 바나바, 그리고 바울과 같이 우리도 이 땅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도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