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조철민 목사(<날샘> 디렉터)
예레미야서에는 언약 관계를 중시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저버린 유다 백성에게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언약을 파기하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가 언약을 파기한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모습을 통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사명자와 함께하시며, 직접 그의 힘과 요새가 되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사명자가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인지 본문을 묵상하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을 깨는 교만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라(렘 11~13장)
11장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시내산 언약을 기초로 하는데,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은 마음의 완악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렘 11:16)라고 부르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알을 숭배하는 죄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 버렸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동시에 예레미야는 “끌려서 도살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양”(렘 11:19)처럼 백성에게 미움받는 존재가 됩니다. 이처럼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명자의 마음을 아시고, 반드시 그 억울함과 고통을 해결해 주십니다.
12장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해 “왜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 12:5)라고 물으시며, 앞으로 더 큰 고난이 다가올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요단강 물이 넘치듯 더 많은 어려움이 닥쳐와도,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이방의 왕들이 유다를 짓밟고, 이후 이방 나라도 결국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유다를 불쌍히 여겨 인도하신다는 선포는 오직 말씀 앞에 순종할 때만 미래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언약 관계가 바로 서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13장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베띠와 가죽 부대의 비유가 나옵니다. 베띠는 제사장이 속옷과 같이 살갗에 닿게 착용하는 것으로, 이것이 썩었다는 것은 언약이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가죽 부대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포도주로 자신의 유익을 채우려는 유다 백성을 취하게 해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합니다. 즉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교만은 내 판단과 생각이 옳다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심판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오직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만이 소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을 여호와께 두라(렘 14~17장)
14장에서는 유다 백성을 향한 심판이 “칼과 기근”으로 계속될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당할 파멸과 상처로 인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시지만, 근본적으로 유다 백성을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와도 하나님의 마음을 유다 백성에게 향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렘 15:6)라고 말씀하시며, 유다 백성에 대한 분노의 임계점이 넘어섰음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고통의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까지 저주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레미야를 책망하시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의 입으로 사용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장에서는 평강과 긍휼을 잃은 유다 백성의 처지를 알리시며, 예레미야를 통해 결혼과 출산, 애곡과 잔치 등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을 금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일상 속 관계를 단절시키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허망하고 헛된 죄를 온전히 청산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렘 16:19)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7장에서는 다시 유다의 죄와 벌에 대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유다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에 대한 단적인 표현이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1)입니다. 이는 그들의 죄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마음이 여호와로부터 떠난 사람을 사막의 떨기나무로 비유하면서, 이런 사람은 삶이 메마를 수밖에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알립니다. 결국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결코 “생수의 근원”(렘 17:13)이자 “피난처”(렘 17:17)이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생수의 근원이자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누리는 길은 곧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렘 17:24). 안식일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절대 관계를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일을 멈추고,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사명자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 금강석 철필로 기록된 죄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판에 기록돼, 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주권을 기억하라(렘 18~21장)
18장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과 유다의 계획이 서로 달라 유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는 토기장이의 절대 주권 속에 진흙의 미래가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유다 백성은 레바논 산꼭대기의 눈과는 대조적으로 신앙의 절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의 계획을 하나님께 고하며 도우심을 구합니다. 얼핏 예레미야의 기도가 복수를 구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물든 인간의 계획을 멈추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길 구하는 기도입니다.
19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가서 유다 백성에게 재앙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바알을 위한 산당을 짓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녀까지 불태워 제물로 바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시며, 토기장이가 정성스럽게 빚은 소중한 옹기를 깨뜨리듯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원 상태로의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백성에 대한 심판을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20장에서는 예레미야가 전한 심판의 내용을 들은 제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폭행하고 감금합니다. 진리와 자유를 선포하던 제사장이 폭행과 감금을 행하는 죄인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행에 대해 바스훌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 심판의 범위를 넓히셨고, 급기야 유다 백성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명자였지만, 현실의 고통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고통이 너무 커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했지만,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묵묵히 헌신합니다.
21장은 시드기야왕이 제사장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바벨론의 침략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칼과 기근, 전염병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결국 다윗 왕조는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정의가 바로 서지 않으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기억하는 자만이 최후에 웃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했던 이유는, 그가 견뎌야 했던 두려움과 답답함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레미야와 같은 고초를 겪으며 사명자로 이 땅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사명자의 외침을 막으려 할 것이고, 사명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도록 종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 교만을 제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명자만이 하나님을 자신의 힘과 요새, 피난처로 고백하며 이를 세상에 선포할 것입니다. 토기장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묵묵히 사명자의 길을 걷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