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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성숙한 믿음과 인격을 갖춘 신앙인’ 정도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agent)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지만,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의 중요한 사명은 더 이상 이 땅이 세상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려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대체 어떤 것이며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들이 어떤 직무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달의 묵상을 통해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임하는가?(6:1~56)
비록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셨지만(6:1~6),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필요나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는 증인들에 의해서 귀신이 쫓겨나고,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6:7~14). 그러자 세상의 왕, 헤롯이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위세를 자랑하던 자였으나, 선지자 세례 요한을 죽인 하나님 나라의 원수입니다. 그는 궁궐에서 귀인들과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잔치는 선지자를 죽여 그 머리를 소반에 담는 죽음과 저주의 잔치였습니다(6:14~29).
그에 비해 하나님 나라의 왕은 ‘한적한 곳’(6:31~32) 곧 광야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섬기며 무리를 먹이는 일을 감당했고, 그 잔치에는 비록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지만 오천 명이 풍성하게 먹고 기뻐하는 생명의 잔치였습니다(6:30~44). 그리고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그 영광을 드러내심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홍해를 갈라 구원하셨던 분, ‘스스로 계신 자’(6:50, I AM)이심을 드러내 주셨습니다(6:45~52).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는 어디에서나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드러납니다. 고향의 회당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예수님의 권능이 사람들이 몰려든 시장에서는 강력하게 드러났습니다(6:53~56). 이처럼 우리 주님이 계시면 풍랑이 이는 바다든 시장이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거룩한 곳이 됩니다.

누구에게 임하는가?(7:1~8:26)
하나님의 은혜는 ‘깨끗한 자’ 즉 거룩하고 정결한 자들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극도로 ‘더러운 것’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전혀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나님과 가까울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완전히 멀었기 때문입니다(7:1~23).
오히려 더러움을 벗고 깨끗하게 되는 은혜를 입은 사람은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겼던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시리아-페니키아) 사람은 유대인에게는 원수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은혜를 구하며 ‘더러운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요청하는 그 여인에게 주님의 권능이 임했습니다(7:24~30).
하지만 이처럼 이방인들에게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며 놀라워하면서도(7:31~37)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를 합니다(8:11~13).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 역시 오병이어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바리새인들과 헤롯을 따르는 자들의 영적 수준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8:14~21).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벳새다 소경은 예수님의 안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나음을 입지 못합니다. 단지 희미하게만 볼 수 있게 되었다가 다시 예수님의 안수를 받고서야 밝히 눈을 뜨게 됩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거듭된 가르침을 받아야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8:22~26).

어떻게 세워지는가?(8:27~9:13)
세상 나라는 대개 한 명의 강한 자가 왕이 되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통해 성을 함락시켜 그 영토를 빼앗고, 사람들을 굴복시킴으로써 세워집니다. 예수님도 자기 군대를 일으켜(제자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외형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진격,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8:27).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표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 한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무리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있었고, 그 사실을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8:28~29).
하지만 이런 베드로 역시 고백 후에 이어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메시아)란 정치, 종교, 군사를 총망라하는 지도자, 곧 왕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타협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실 영광의 길은 바로 모욕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나를 따르라”는 군사적인 뉘앙스가 포함된 표현을 사용하시면서도, 칼과 창이 아닌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8:27~38).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9:1).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크신 분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초막’ 이야기는 추수를 기념하는 유대인의 초막절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이 마지막 추수의 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봤음을 드러내 줍니다(9:2~8).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지신 분으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며, 이미 엘리야(세례 요한)를 앞서 보내 그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신 분입니다. 이 놀라운 영광의 왕께서 단지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나라를 세우는,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다스려지는가?(9:14~50)
하나님 나라는 세워지는 방식도 세상 방식과 상반되었듯이 통치 방식 또한 세상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계시던 동안 한 사람이 벙어리 귀신 들린 자신의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이번에는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유대교에는 논쟁 문화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능력으로 귀신을 제압할 수 없자, 제자들은 세상의 논쟁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9:14~18).
이런 상황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에게도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함이 없다”는 예수님의 질책 섞인 가르침에 그 아비가 외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9:23~24)라는 모순어법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연약한 믿음의 부르짖음에 근거해 그 아이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잘 짜여진 논리적 변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기도였습니다(9:19~29).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제자에게 가장 미숙한 모습은 논쟁(변론)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지위를 높이려는 태도입니다. 열두 제자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 가운데 누가 제일 크냐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되는 길은 끝이 되는 것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입니다(9:30~37).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정치에서는 파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서로 섬기고, 물 한 그릇을 나누는 것을 통해서 칭찬과 상을 받습니다. 서로 파벌을 짓고 반목하며 싸우는 행위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입니다(9:38~50).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종교적 외식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짐으로써 세워지고, 힘과 권위가 아니라 겸손과 섬김으로 통치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이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9월,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묵상하는 한 달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박희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