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불현듯 무기력하게 축 처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더운 날씨 때문이라고,
최근에 조금 피곤했기 때문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나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데, 주위에는 나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나는 왜 이럴까?’ 만약 이런 생각이 든다면, 지금 나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행 9:2, 19:9, 23, 22:14, 22). ‘그 길’이란 곧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마가복음을 따라가면서 이 질문에 답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1:1~2:12)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이라는 기록 의도를 명백히 밝히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메시아(그리스도)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것과 같은데, 그때 하늘로부터 난 소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선포였습니다(1:11). 이전에는 죄와 죽음과 사탄이 왕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새 왕이 되셨습니다. 왕이 바뀌면 새 왕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바뀝니다(1:16~20).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권위가 있었기에 그 앞에 귀신도 복종했습니다(1:21~22).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귀신들의 입을 막으시고(1:25, 3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을 때 오히려 그들을 떠나 홀로 기도하시며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1:35~38). 또한 예수님은 부자나 권력자들을 찾지 않으시고, 오히려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부정한 자를 찾아가 치유하시며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1:21~45).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서기관들에게는 충격적인 사실이겠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오셔서 그 권세를 발휘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2:13~3:35)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1:15).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조건은 첫째는 회개, 둘째는 믿음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이전의 사회적, 종교적 지위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일로 생계를 꾸려야 했던 사람들, 예: 도축업자, 가죽가공업자 등)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2:13~15).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2:17)는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의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죄인’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둘째,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인습에 지배받지 않으셨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세상 문화는 갈등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생베 조각이 헌 옷을 더 해어지게 하듯이, 새 포도주가 헌 부대를 터뜨리듯이, 복음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세상에 세워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기존 질서와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2:21~22).
기존 가치관과의 갈등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시고,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치시며(2:23~3:6)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3: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 법을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기존 질서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기준에 합하지 않은 자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계셨고, 그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으셨지만 ‘회개’와 ‘믿음’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 낫기’를 바라며 몰려드는 무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3:7~12). 예수님의 친족이라 하더라도 이 기준을 만족시키지 않는 자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기에 친족들마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3:21).
예수님께서 권능을 주시며 함께하셨던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살펴봐도, 그들이 이전부터 예수님과 가까웠을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3:13~19). 예수님은 인간적 관계성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3:3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면모는 기득권자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3:22)는 등의 모독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셨습니다(3:23~30).
제자의 특권과 요구(4:1~5:43)
예수님의 제자는 특권을 가집니다. 우선 비유로 무리들을 가르치신 이야기에서 이 특권이 잘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비유로 가르치신 후에(4:1~9) 그 의미를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셨습니다(4:11, 33~34).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리들이 아닌 제자들에 의해서 은밀히 성장해 갑니다. 세상은 그것이 작고 초라하다고, 어떻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추수 때가 이르면 어느새 제자들에 의해 강성해져 있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게 됩니다(4:26~32).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며 어떤 사람도 제어할 수 없는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큰 광풍과 물결을 잠잠하게 하셨고(4:39), 그 어느 누구도, 쇠사슬로도 묶어놓을 수 없었던 거라사 지방 광인의 군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5:8). 제자들은 그 놀라운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고, 그 역사에 참여하는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특권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누리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입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은 이 믿음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4:40).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은택을 얻지 못한 것은 거라사 지방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작 군대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큰 소리로 고백할 정도였지만(5:7), 그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본 거라사인들은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실 것을 요청합니다(5:15~17). 그들에겐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택을 누리기 위한 믿음이 없었고, 다만 자신의 재산에 피해가 갈까 두려워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다시 돌아오셨을 때 있었던 일(5:21~43)은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가는 열두 살 된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부탁해 수많은 무리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시는 길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믿음의 손을 뻗어 예수님께 댄 것은 그 여인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34)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혈루증에 걸린 부정한 여인으로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는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 두려움을 이기고 예수님께 손을 뻗은 여인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도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5:36)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실 때 비웃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큰 능력 앞에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에 두려움을 느껴 세상적인 해결법을 찾아나선다면 마치 혈루병 걸린 여인이 수많은 의원에게 고통을 받았던 것과 같은(5:26)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8월,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묵상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