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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세상을 이기는 제자들

과월호 보기 박희원 목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가치관이나 문화와 갈등을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전쟁’에 비유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시시각각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영적 도전에 맞서 싸우고, 물리치는 영적 전쟁을 합니다. 예수님 역시 그 전쟁을 치르셨고, 최종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세상의 시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수단을 선택하지도,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따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께서 행하신 대로 영적 전쟁을 수행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영적 전쟁을 감당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부분과 십자가, 부활 사건은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 일들을 통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들을 배울 수 있기도 합니다.

 

의미 vs 효율(막 14:1~11)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실제 기름 부음이 일어난 곳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입니다. 기름 부음이라는 예식을 거행하기 위한 장소로써 적절해 보이지 않을 뿐더러, 기름 부음을 시행한 이도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닌 한 여인이었습니다(요한복음은 그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소개함, 참조 요 12:3). 그런데 거기에 사용된 기름은 삼백 데나리온, 노동자 300명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비싼 것이었으니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 낭비요, 극도로 비효율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전혀 적절하지 않은 장소와 사람에 의해 엄청난 비용을 들인 일이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선포되셨습니다. 또한 그 여인은 자신의 생명, 몸을 상징하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십자가(장례)를 준비함으로써 자신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 어디에서나 전해질 사건이 됐습니다(14:9).
물론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단 예수님의 제자들은 효율을 추구하기에 앞서서 이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집중했어야 합니다.

 

용납 vs 분열(막 14:12~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인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가 곧 도망하고,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자신을 배신할 그들과 함께할 식사 자리를 마련하시고(14:13~15)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14:22~25).
그런데 제자들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예언 앞에서 “나는 아니지요?”(14:19)라고 질문하기에 바쁩니다. ‘너희 중 하나’가 스승을 팔리라는 예언 앞에서 ‘우리’라는 차원이 아니라 ‘나’는 아니라며 경계선을 긋는 것에 몰두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다’ 버릴지라도 ‘나는’(14:29)이라는 말에서도 같은 태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죄악을 보며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또 ‘우리’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저 사람, 저들’의 문제라고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비록 자신에게 등을 돌릴 자들이지만 그들과 끊을 수 없는 언약 맺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따를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 vs 육신의 능력(막 14:32~52)
예수님은 제자들과 언약을 세우신 후 겟세마네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잠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14:38)고 하셨듯이 우리 육신의 힘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의지력을 믿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큰소리쳤지만, 정작 졸음을 이기지 못해 예수님의 기도에 동참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잡히시는 것을 보고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는 어리석음까지 보였습니다(참조 요 18:10).
결국 육신의 힘이나 검과 몽치와 같은 무기를 의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기도가 아닌 자기 능력과 의지, 또는 소유를 의뢰하게 된다면 마치 벗은 몸을 가렸던 베 홑이불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하는 것과 같은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14:51~52).

 

진리 vs 거짓(막 14:53~72)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시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감추는 데 급급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기 힘든 여종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거짓을 말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14:71). 그가 이렇게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은 겟세마네에서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진리를 말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용기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뢰하는 기도의 자리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막 15:1~41)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입에 의해서,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이라 칭함을 받으셨습니다(15:2, 9, 12, 18). 또한 수많은 사람의 비난과 욕설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15:32)라 칭함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비참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가운데서는 참 영광을 얻으신 사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과 동시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인정했습니다(15:38~39).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요, 패배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땅의 왕,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났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깊이 깨닫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간다면 주님께서 얻으신 영광과 승리가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영광의 승리(막 15:42~16:20)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지만 제삼 일, 안식 후 첫날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이 참 승리자가 되셨음을 증명해 보이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기 위해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공생애 전반기,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으실 때는 침묵하라는 명령이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된 여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16:8). 부활의 영광은 이전에 갈릴리에서 보이셨던 그 능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원래 마가복음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많아 진정성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주제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이기시고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16:17~18).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주님의 부활로 인해 확증된 주님의 영광과 권능을 알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에 참예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을 믿는 자로 서 있음을 확신할 때, 우리도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승리의 실제(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영광을 얻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셨다는 소식, 곧 복음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권능을 발휘하는지는 빌레몬서를 묵상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뿐 아니라 형제로 여겨달라고까지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오네시모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1세기 로마 사회의 노예, 특히 주인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와 같은 노예가 붙잡히면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했고, 그 손에 편지(빌레몬서)를 들려 보내서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망친 노예를 죽이지 말고 잘 대해 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로 여기라는 가르침은 당시로서는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혁명도, 반란도, 전쟁도 이룰 수 없었던 놀라운 사회변혁을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노사도의 편지에 담긴 복음의 능력이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세상의 역사는 결국 예수의 제자들이 승리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 길을 걷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솟는 샘물>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승리의 길을 한 걸음씩 걸으시기 바랍니다.     <박희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