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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2월

공평하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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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을 사랑이라고 나타내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왜 전쟁과 기근으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 가야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애초부터 악이란 것을 이 땅에 허락하셨는가? 수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들 속에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어야 해’라는 질문자의 보이지 않는 틀이 존재한다. 이 틀에 하나님을 맞추다 보니 이해할 수 없다. 마치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오해한 것같이 말이다.
나는 형보다 8년이나 늦게 태어나 주워 와서 키웠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어렸을 적에 가끔 닭백숙을 먹은 기억이 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형 그릇에는 닭다리를, 내 그릇에는 닭목을 담으셨다. 형은 다리가 더 튼튼해져야 해서 닭다리를 먹어야 하고,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니 닭목을 먹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셨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였다. 형은 어릴 적에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 잘 먹지 못해 키가 작았다. 그런데 나는 챙겨 주지 않아도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형의 그릇에 닭다리뿐만 아니라 닭가슴살도 훨씬 더 많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확신했다. 엄마는 형을 더 사랑한다고. 나는 정말 주워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초등학생 수준의 사랑의 틀로 부모의 사랑을 재단해 버린 것이다. 나는 결혼할 때쯤에야 그것이 나와 형을 똑같이 사랑하신 엄마의 사랑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내 어머니보다 편애가 좀 더 심하다. 하나님은 아예 ‘나는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가 공평하다고 여기는 사랑이 불공평한 것이 된다.
부모가 되면 바로 안다. 아픈 자녀에게, 아직 앞가림을 제대로 못하는 연약한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가고, 그래서 나의 것을 내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