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아버지가 집에 찾아오셔서 숙제 하나를 내 주신 적이 있다.
여든이 넘은 고령이심에도 나를 위해 매일 세 시간씩 기도하시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숙제로 받고 충실히 이행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을 매일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이 숙제였다.
그것도 “네 영혼이”를 “내 영혼이”로, “네가 범사에 잘되고”를 “내가 범사에 잘되고”로 바꿔서 선포하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내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복주의적인 해석에 대한 우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붙들고 살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가 수많은 성경구절 중에 이 말씀을 숙제로 내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매일 선포하면서 기도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왜 그런 숙제를 내주셨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말씀에는 사랑하는 자를 향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사랑하는 나의 자녀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말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를 위해 매일 간구하실 때에도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셨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나 자신이 이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를 위해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산다.
기도 없이 인생의 걸음을 뗀다는 것은 너무도 불안한 일이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어떤 기도제목’으로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경향이 있다.
요한삼서의 이 말씀은 기도에 관한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해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