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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고등학생이 된 그해는 다른 느낌으로 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시가 물리적으로 가까운 시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기운 없이 고향이나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마치 머나먼 외국에라도 온 듯 처량한 표정을 하고 봄을 심하게 탔습니다.
어느 날 청소 시간, 여느 때처럼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흘러나오는 행진곡을 들으며 창문을 연 순간 아름다운 장관에 내 눈을 잠깐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엔 마음속의 칙칙함을 한 번에 날려 줄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 따라 천사의 손짓처럼 흔들리고 있는 벚나무가 있었습니다. ‘노란 손수건’이야기에 나오는 참나무처럼 희망을 주렁주렁 달은 듯이 보였습니다.
열일곱밖에 안 된 나는 세상의 고뇌를 다 가진 듯이 땅바닥만 보고 걷느라 몇십 년은 되었을 벚나무가 이렇게 꽃이 만개할 날을 기다리며 조금씩 피어나고 있던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작지만 큰 깨달음이었고 내게 인내의 다른 관점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괴롭게만 한다고 생각한 그해의 봄에게 마음을 열고, 벚꽃처럼 환한 웃음소리로 허공을 가른 그날부터 더 이상 학교가 회색빛 암울한 장소만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벌판을 견딜 새 힘을 얻고 난 얼마쯤 후, 세차게 온 비에 꽃잎이 모두 떨어졌지만 슬프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꽃잎들은 고스란히 가슴속에 새겨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내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십몇 년을 더 보탠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영혼의 세포에 희망을 떨어뜨려 준 그 벚꽃은 때마침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언제나 숨은 위로를 주십니다. 그 위로로 고단한 삶은 봄빛처럼 따스한 숨을 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