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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최고의 직장을 포기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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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월, 평양 식산은행(殖産銀行)에 다니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은행 직원 한 명을 더 채용할 일이 생겼는데 “평양상업학교를 1등으로 졸업한 친구가 있으니 그 친구를 채용해달라”라고 추천했다는 것이었다. 식산은행은 당시 금융기관 중에서 월급을 가장 많이 주는 곳이었다. 그보다 기쁜 소식이 없었다.
바로 평양으로 달려가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독보회(讀報會)가 걸림돌이었다. 독보회란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직장마다 새로 생긴 조직으로, 이름 그대로 ‘읽고 보고하는 모임’이었다.
직장 상사가 2~3개월 전에 직원 한 명을 지명하면 그는 이 기간에 화제가 되는 시사 관련 기사와 문서를 다 읽고 준비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매 주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 열리는 독보회 시간에 그동안 준비한 시사 문제를 발표한다. 공산 치하의 모든 직장에서는 매 주일 아침 10시에 출근하여 2시간 동안 독보회 모임에 필수로 참석해야 했다. 독보회는 기독교에 대한 실질적인 종교 탄압이었다.
독보회에 참석할 수 없어 식산은행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하자 친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직장인에게 독보회 참석은 상식인데 그걸 몰랐나, 여기가 얼마나 좋은 직장인데 포기하려고 하느냐”라며 답답해했다. 나를 추천해준 친구가 고마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주일성수 문제로 그 아까운 은행 취직을 포기하고 돌아올 때 내 몸의 절반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식산은행에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식구들도 야단이 났다. “그 좋은 직장에 왜 안 들어가느냐” 하며 난리였다. 주일성수를 모르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1948년 2월 식산은행에 들어갔다면 그해 9월 평양신학교에 가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목사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식산은행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