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우은진 기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 말씀은 왕년 ‘탁구여왕’으로 불린 탁구계의 전설 양영자 선교사가 삶의 위기 때마다 붙들었던 생명수와 같은 말씀이다. 88올림픽 때 여자 복식조에서 현정화 선수와 함께 전 국민을 환호케 했던 그녀는 그동안 몽골 선교사로서 15년간 사역하고 지금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상태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나 바쁜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탁구선수로 15년, 몽골 선교사로 15년 사역을 모두 마치며, 삶의 고비마다 큐티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생생하게 들려 준다. 그녀의 삶을 말씀과 함께 따라가 보자.
팔꿈치 부상으로 치유의 주님을 만나다
최근 개봉한 탁구영화 <코리아>의 실제 주인공인 현정화 선수와 함께 88올림픽 때 환상의 복식조를 자랑했던 양영자 선교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던 같은 반 아이들과 달리, 그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모습을 본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탁구를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우연히 탁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탁구는 그녀의 재능과 마침 잘 맞았다. 국가대표가 되는 꿈을 안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유망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팔꿈치 부상을 당해 통증이 심해지자 진통제를 맞고 시합을 해야 했다. 6년 동안 진통제를 맞으며 시합을 한 그녀는 주사를 맞아도 효과가 없자 탁구를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며 치유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그녀는 6년 동안 아팠던 팔이 치유되는 기적을 경험하고, 평생 하나님께 그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되었단다. 한마디로 삶의 가치관이 변화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88올림픽 금메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훈련을 재개하면서 ‘훌륭한 탁구선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19세에 국가대표가 된 그녀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팔꿈치 부상이 완쾌된 지 1년 만에 다시 간염으로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몸도 약해졌고 두통으로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시합에 나가면 번번이 패했다. 그리고 언론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녀는 탁구를 그만두는 문제에 대해 다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는 잠언 24장 16절 말씀을 주셨다.
그 후 86년, 87년, 88년 올림픽까지 각종 세계대회에서 탁구 최강이었던 중국을 꺾고 금메달 3연패를 할 수 있었다.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기본훈련은 물론, 체력훈련까지 심층훈련을 거듭했다. 이미 87년 세계대회 복식부분에서 금메달을 땄기에 모든 언론과 코치들의 금메달을 획득할 거라는 기대감이 88올림픽 때는 더 컸다. 만약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클지 그녀 스스로가 더 잘 알기에 부담감이 큰 대회였다.
중국과 복식 맞대결을 한 올림픽 경기는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면서 응원해 준 대회였다. 동점이 되고, 이길 때마다 현정화 선수와 기도로 손을 맞잡았다. 당시 ‘환상의 복식조’라는 평가를 받은 현정화 선수와는 같은 방을 쓰며 짝기도를 하면서 영적·정신적으로 호흡을 일치시켜 나갔었다. 마침내 탁구 대국이었던 중국을 꺾고 정말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드려졌다.
그녀는 “탁구는 공이 예민하고 가볍다. 그리고 코트는 그 어느 종목보다 좁기 때문에 경기 당일의 컨디션과 순발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신앙이 없었으면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올림픽 이후, 심각한 우울증을 겪다
88올림픽 이후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현정화 선수와 달리, 서서히 언론의 관심에서 사라진 양영자 선교사. 그녀는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당시 큰 영향력을 미쳤던 어머니가 소천하자 우울증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3남3녀 중 막내딸이었던 그녀를 위해 탁구에 필요한 기구들을 마음껏 지원해 주었고, 영적으로도 새벽기도로 지원해 주셨다. 그런 어머니와의 이별은 그녀를 더욱더 골방으로 밀어 넣었다.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오전에는 탁구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체육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려 했지만 영적인 메마름이 갈수록 커졌다.
남들이 보기에는 미래가 탄탄대로였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행복하지 않았다. 지도자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영적 억압과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어머니가 간암 투병 끝에 소천하자 심각한 우울증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기도 싫었고, 아침에 해뜨는 것조차 보기 싫었다. 내일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지인의 소개로 영동 세브란스병원에서 상담을 받았다. 진단 결과, 심각한 우울증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의사와 지인의 헌신적인 돌봄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 지인은 그녀가 병이 다 나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저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좋은 자매로 비춰졌는데, 사실 저조차도 저의 상태를 잘 몰랐었다”며 “우울증을 겪으면서 부족한 믿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큐티를 통해 말씀묵상을 하면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운동을 위해 신앙생활 한 것을 회개했다. 자신이 왜 이런 어두운 상황, 쇠사슬에 매임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는지 깨달았고, 말씀 안에 거하면서 차츰 회복하게 되었다.
그 당시 주님이 주신 말씀이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는 시편 107편 10~11절이었다.
우울증, 남편과 큐티 나누며 회복되다
그녀는 거울로 비춘 듯 말씀 하나하나가 자신과 닮아있음을 목격했다. 하루하루 말씀을 통해 회복되어 갔고, 이윽고 주님이 예비하신 만남을 갖게 되었다. 바로 같은 사랑의교회 청년부에 있었지만 서로 만난 적은 없었던 남편 이영철 선교사다. 당시 남편은 연합통신 기자였는데, 처음으로 자카르타로 출장을 갔다가 지인의 소개로 자카르타에서 훈련 중이던 양영자 선교사와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 새벽기도와 아침 큐티를 서로 나누며 그녀의 영적 갈급함을 남편인 이영철 선교사가 채워 주게 되었다. 그는 당시 교회 청년부 내에 양영자 선수를 위한 기도모임이 있어서 그녀가 영적으로 힘들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직접 만나 말씀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고 회고한다.
몽골 선교사로 제2의 인생길을 떠나다
그녀는 말씀과 남편과의 큐티 나눔으로 긴 우울증의 터널을 지나고, 마침내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아 키우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97년 몽골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사역을 하기 위해 떠나게 되었다.
그녀는 우울증 때문에 아예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선교의 꿈도 꾸지 않았었는데 차츰 회복이 되면서 선수시절부터 ‘탁구를 통해 선교하겠다’라는 꿈을 다시 품게 되었다고 한다. 마침 남편 이영철 선교사도 예수전도단 직장부 성경그룹에서 제자훈련을 받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는데, 둘은 큐티를 할수록 선교사에 대한 비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왜 몽골이었을까? 그녀는 “공산국가였다가 개방국가로 변한 몽골 백성들의 공허한 가슴에 복음을 전하면 빨리 전도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일할 곳이 많은 곳에 달란트를 가지고 가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세계기도정보 책자를 갖고 기도할 때 3개국 후보지 중에 몽골이 있었고, 마침 몽골사람이 집에 와서 머무는 계기도 있어서 몽골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편 이영철 선교사는 지난 15년간 몽골어 전통문자를 번역 출판했다. 몽골어도 몰랐던 사람이 몽골어 전통문자까지 번역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교지에서는 비자 문제가 선교사역에 집중할 힘을 빼앗기 일쑤라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탁구사역으로 인해 비자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어 남편이 성경번역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은혜, 이시은 두 명의 몽골선수를 귀화시켜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그들은 한국에서 탁구 국가대표가 되는 게 꿈이다.
그녀는 몽골 선교사역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를 “복음을 가지고 섬기려고 왔는데, 현지인들이 상식이 통하지 않아 마음 문을 닫았을 때”와 “특히 의료적 도움을 받기 힘든 지역에서 안면이 마비돼 앞을 볼 수 없었을 때였다”라고 회상했다.
그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는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
갑작스런 안면마비 증세는 당시 그녀에게 기도와 선교사역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평생 입술이 비뚤어져 있어도 감사하며 사역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섬겨야 할 자로서의 본분을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때 이 말씀은 그녀가 위로를 받은 말씀으로써,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고 한다.
제3의 인생길, 말씀을 펴고 기다리다
지난 3월 10일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녀는 몽골 사람들이 혜성처럼 세계역사를 재패한 경험이 있듯이, 전 세계에 흩어진 몽골족 800만 명을 주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귀중한 통로로 사용하셨으면 하는 기도제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탁구와 선교사 사역을 각각 15년씩 체험한 그녀는 이제 제3의 인생길을 놓고 기도 중이다. 물론 어떤 일을 하든지 탁구는 그녀의 인생길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코리아>라는 영화를 보며 탁구인으로서 기쁨을 느꼈다는 그녀는 “당시 선수들이 45일 동안 새벽기도를 드렸고, 결국에는 주님께서 금메달을 주셨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이 다뤄지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선교지에서 청소년들에게 탁구를 가르치며 사역한 것처럼 그녀는 장소가 어디가 되었든지 계속해서 청소년들에게 탁구를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을 표현한다. 또한 성경번역의 달란트를 지닌 남편과 더불어 말씀 사역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으로 유익하다고 했는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등불과 같다”며 “말씀을 묵상한다고 내 문제가 금방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날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해결해 주실 때도 있고, 통찰력과 분별력을 주셔서 위로와 힘을 받게 된다”며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제3의 인생길 진로 역시 말씀을 펴 놓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다음 사역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 중”이라며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방긋이 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