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도 특이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도 남다른 깊이가 있는 최영우 대표이사를 만났다. 그의 직업은 국내에서 비영리기관의 모금 컨설팅만 전담으로 하는 (주)도움과나눔의 CEO다. 그에게는 한국해비타트 1호 스태프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다. 그만큼 비영리기관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 기업을 대상으로 모금과 기부를 이끌어냈던 그만의 노하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도움과나눔은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모금 컨설팅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연매출이 40억 원에 이르는 전문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 지금까지 안정적인 직장생활보다는 유목민적인 삶을 살아왔다며, 자신의 기부문화 컨설팅의 근간은 성경이라고 강조한다. 말씀만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사회 정의와 토지문제에 관심을 갖다
믿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에 진학하며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게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예수>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 무리에 끼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교회에 스스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대 진학 후 IVF 활동을 했던 80년대의 사회 상황은 말 그대로 격동기였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사회적 정의문제는 지금 대학생들의 취업문제만큼이나 심각했었다.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유독 토지와 정의문제 등에 관심이 갔다. 그러면서 왜 교회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까 고민했다.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던 그는 대학원에 가서 세 가지 화두를 붙잡았다. 첫째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정의, 둘째는 성령의 역사하심, 셋째는 내면에 형성되는 성령의 열매였다. 스스로 내면의 상처를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정의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IVF에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정의에 대해 공부하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책들을 보게 되었고, 성령의 외적 은사도 동시에 체험했다.
대학교가 휴업하자, 아침 일찍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성경 보는 일을 계속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 지금은 고난의 떡과 물을 마실지라도 앞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
이후 그는 대천덕 신부의 저서들과 예수원 식구들을 통해 토지와 희년에 관한 문제를 보게 되었고, 당시 헨리조지협회(이후 성경적토지모임으로 이름 변경) 간사활동도 잠시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영적 멘토가 된 고왕인 장로도 만나게 된다.
이후 산업연구원에서 환율 예측 업무를 맡아 일했고, 2년쯤 되었을 때 주님께서 십자가를 자주 보여주시는 것을 느꼈다. 성경을 읽어도, 설교를 들어도 십자가가 자주 보이고 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하는 그는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인생의 방향을 선회했다. 바로 예수사회영성변혁운동을 하며 신문을 만들고, 기도회를 열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제대로 유목민이 된 것이다.
한국해비타트 1호 스태프로 섬기다
그런데 같이 일하던 사무실에 어느 날 한국 해비타트가 들어왔다. 통역을 하다가 멘토인 고왕인 장로가 실행위원으로 해비타트를 섬기면서 함께 초대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2001년까지 그는 국내외에 집도 지어주고, 기업과 파트너십 연대도 하면서 많은 학습의 기회를 얻었다. 기업을 대상으로 한 모금컨설팅이 거의 없던 시절에 몸으로 부딪히며 하나하나 만들어 갔던 것이다.
집이 없는 아주 가난한 사람과의 만남에서부터 국내 굴지의 부자와의 펀드레이징(Fund-Raising)까지, 국제조직과 연대 그리고 일상의 의사결정까지 해비타트에서의 일은 그에게 광야에서 길을 하나씩 만들어가게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는 “월급은 적었지만 일하는 보람이 컸고, 국내에는 낯선 여러 가지 모금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다 2001년을 지나면서 해비타트가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유명해지고, 조직이 커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떠나야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홀로 설 준비를 했다.
(주)도움과나눔으로 인도하시다
해비타트에 사표를 내고 한 비영리컨퍼런스 모임에 강사로 나서서 모금 노하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주)도움과나눔의 모체가 된 도움넷 기부사이트 직원 몇 명이 그 모임에 참석을 했다. 직접 회사에 와서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당시 도움넷이 비즈니스모델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고 한다.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그는 한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상의를 하다가 마침 또 그 교수가 당시 도움넷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교수는 그에게 회사 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저기 강연 요청이 쇄도해 직장생활 할 때보다 오히려 수입이 많았지만 그는 도움넷 대표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받아들였다. 입사조건은 기업의 사회공헌, 비영리단체 모금 전략, 모금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회사에 들어와 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월드비전이나 기아대책기구 등은 대중 모금은 잘했지만 기업 모금에 있어서는 약했다. 그는 해비타트에서 기업 모금을 했던 강점을 살려나갔다. 한 달 만에 회사 사무실이 역삼역 화려한 빌딩으로 옮길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벤처기업의 거품이 사라지자, 회사의 경기는 굴곡이 심해졌다. 너무 어려울 때는 차를 운전하면서 외마디 외침에 가까운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반전의 기회가 찾아오다
그런데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해외 제휴회사와 만나 강력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모이는 모금컨설팅협회 동남아시아 지역모임에서 모금 강의를 했던 그에게 한 영국 신사가 다가왔다. 자신이 브레이크레이(Brakeley) 아시아 대표인데,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회사가 바로 100년도 더 된 미국 메이저 모금컨설팅기업이었다.
그는 명성이 자자한 브레이크레이(Brakeley)의 노하우를 배우게 되었고, 그곳의 대주주였던 기업가가 한국 사업을 정리하며, 도움넷의 주식을 모두 그에게 주는 행운까지 얻게 된다. 그때가 12월이었는데, 그는 모처럼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서울대 모금 컨설팅을 하면서 인지도를 쌓아갔다. 점차 대학과 병원 등 비영리단체의 모금 컨설팅 경력이 하나둘씩 쌓이게 되었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자신감이 쌓이자 또 다른 사업 모델들을 만들게 되었다.
(주)도움과나눔은 6년 전부터 재정적 자립이 가능해졌고, 모금 컨설팅 분야에서 입소문이 났다. 이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타 기업이 아닌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 결과, 비영리단체가 모금을 고민할 때 같이 상의하는 컨설팅 회사로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학, 병원뿐만 아니라 IVF, 독수리중고등학교, 문화예술단체 등 모금과 기부문화가 그 조직의 선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모금은 조직의 정체성을 강화시킨다
그는 우리나라가 정서상 기분문화에 민감한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재난이나 외침, 국난이 왔을 때 팔을 걷어붙이고 서로 돕는 심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문화는 이런 모금과 기부문화에 불을 붙였다.
(주)도움과나눔은 비영리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영리회사라고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그는 모금 컨설팅의 노하우가 필요한 곳에 글이나 교육, 문호도 개방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본질적 시각 자체가 바른 방향으로 되어 있고, 그 일이 사회에 필요한 일이면 사회에 그 일을 만들어 줘서 계속 가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모금 컨설팅 지론이다.
특히 그는 독수리중고등학교를 컨설팅할 때 큰 보람을 느꼈다. 건물이 없어서 교회를 빌려 쓰던 대안학교가 모금 컨설팅 이후 별도의 건물을 얻어 독립하게 되자 학교가 더 강해지고,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IVF도 동문들을 대상으로 100억 원을 모금하면서 기독교적 정체성이 더 강화되었고, 서울대 역시 3500억 원을 모금하면서 조직의 중요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모금이나 기부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게 아니라, 그 조직이 본질적인 면에 충실하도록 도와주고, 조직이 강해지기 위한 전략 수립을 지원한다”고 강조한다.
헬라어, 히브리어 고전공부가 도움이 된다
6년 전부터 그는 헬라어와 히브리 원어로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명절 때는 아예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부한다. 그렇게 해서 영어로 된 고전어 문법책 50권을 이미 독파했다. 회사 업무로 머리가 복잡할 때, 오히려 헬라어 문법책을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 경영학이나 사회학에서 배울 수 없는 부분을 원어 성경과 교회사나 역사학에서 얻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고전이 비영리에 대한 이해, 사업의 모델과 철학을 형성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히브리서 1장 3절이 (주)도움과나눔의 정체성에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는 ‘만물을 붙드시며’가 헬라어로 페로인데, 이는 ‘지고 간다’, ‘견딘다’, ‘생명을 준다’ 등의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만물을 붙든다는 것은 능력의 말씀으로 살린다는 의미이다. 즉 그가 (주)도움과나눔을 통해 비영리단체의 모금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회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비영리단체의 사명을 말씀이라는 역동적 언어로 풀어낸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그동안 그는 언어로 비영리단체를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없었는데, 말씀을 통해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선에 대한 해석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는 말씀을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식과 삶,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다. 직접 책상, 침대 등 가구를 만드는 것이다. 해비타트 시절 망치와 못에 익숙해진 그는 예수님이 목수로서 굉장히 치밀하신 분임을 목공을 하면 할수록 깨닫는다고 한다. 가구의 치수를 재고, 치밀한 업무 프로세스가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는 공방에서 나무를 샌딩기로 갈 때마다 쾌감을 느낀단다. 직원들이 결혼할 때는 선물로 좌탁이나 콘솔을 직접 만들어준다.
이에 대해 그는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직접 했던 일인데, 현대 사회는 전문가의 장벽이 너무 심하다”며 “큐티 역시 경건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전문가가 아닌 본인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사회가 굉장히 유동적인 사회로 바뀌고 있다며, 이런 사회에서는 학력이나 스펙의 수명이 짧아지고, 생각하는 힘, 문제해결 능력, 커뮤니케이션의 힘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지식을 대하는 자세, 삶과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보통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만 관심을 갖는데, 하나님은 세상에 관심이 많으시고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기를 원하신다”며 세상의 필요와 내 진로가 연결될 때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20년간 안정된 것을 버리고 유목민처럼 살아왔던 그는 유목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우리에게 안정을 주는 것이 없다는 점이라며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