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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10개의 머리와 100개의 손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유되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이력은 독특하고 화려하다. 그는 목회자이자 신학자였으며, 교회 개혁자이자 정치인이었고, 언론인이자 대학 설립자인 동시에 대학 교수였다. 그러나 다양한 이력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의 시대정신에 맞서 성경으로 돌아가 모든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고 외친 그의 정신과 실천적인 삶이다.
19세기는 절대주의와 교회 권력의 타락에 반해 일어난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진화론 등의 발전이 이어진 시대였다. 네덜란드 역시 이러한 사상의 바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러한 때에 레이던대학에 입학한 그는 근대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의 신앙을 버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존 칼뱅과 존 아 라스코라는 두 신학자의 교회관을 비교하는 논문을 쓰기 위해 칼뱅을 연구한 것과, The Heir of Redclyffe(레드클리프의 상속자)라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이 말한 교회를 사모하게 된 것, 그리고 목회지에서 정통 신앙을 가진 성도들과 만난 것 등 일련의 섭리적인 사건들을 계기로 진정으로 회심하고, 칼뱅주의의 길로 전향한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사라진, 하나님과 성경이 사라진 교회와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국가교회의 개혁을 위해 인생의 1막을, 그 후에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종교 개혁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영역주권론’을 주장하는 정치인으로서 인생의 2막을 쓰며 총리에까지 당선된다. 그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기독교 교육의 자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의 등에 인생을 걸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다채로운 이력만큼 그는 죽는 날까지 다양한 입장에서 칭송과 비판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그에게 중요한 것, 그가 죽음 전까지 전하고자 한 것은 시편 46편 1절 말씀의 하나님이었고, 그가 교회와 사회를 향해 외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었다.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 치도 없다.”
<박시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