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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노아의 방주

과월호 보기 한정희 교수·홍익대 미술대학

대홍수는 악한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의 세 아들 부부와 방주에 탄 동물들을 통해 인류와 이 땅을 구원하셨다. 어마어마하게 높은 파도와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크기까지 정해 주신 완벽하고 안전한 배였던 노아의 방주에는 모든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암수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이 주제는 작품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주제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작가들이 있어 흥미롭다.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공포와 혼돈에 빠졌을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닥친 최후의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 또한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 측면을 부각시키며 작업을 하였던 이는 일본 근현대기의 후쿠자와 이치로(福澤一郞, 1898~1992)였다. 그는 일본에서 초현실주의를 초기에 도입한 대표적인 작가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신자는 아니었지만 다양한 기독교 주제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였다.
후쿠자와 이치로는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이, 동물들과 사람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남기 위해 큰 나무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표현했다. 인간의 생존본능을 드러내며 처절함과 격렬함이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화면 위쪽에는 이미 닫혀버린 방주를  향해 안타깝게 절규하는 무리들을 볼 수 있다. 작가는 방주의 안보다는 밖의 현실을 묘사하고자 했으며 동물들과 인간들의 긴박한 생존의 몸부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한국의 현대작가인 고영빈은 구원의 상징이기도 한 노아의 방주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지만 신앙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우리와 동격으로 대비시켜 작품화하고 있다. 세상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마치 비어 있는 방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의 방주는 자그마하고 그 안이 텅 비어 있다. 그의 방주는 “자신만의 공간이며 자기 안에 진리가 없으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심정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 소개된 작품에는 멀리 곤돌라와 같은 작은 보트가 외롭게 떠 있으나 어떤 동물도 그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앞의 피에로에게로 나아가고 있다. 이 피에로는 혼자 구원받았다고 자위하며 살아가는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모습이 아닌, 교만과 이기심이 없는 순수한 인물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을 비판하고 있지만 아울러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서 방주는 사라진 예전의 신화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각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지금이야말로 모든 인간과 생명을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구원의 방주를 각자가 띄워야 할 때임을 이 작품이 말하고 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 3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