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안소영
<책 속의 명문장>
세상의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는 것, 믿음의 성장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세상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했는지 깨닫게 됐다. 헨리 나우웬과 C. S.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헨리 나우웬의 『영성수업』
나는 기도를 그 음성, 나를 사랑하는 자라 부르시는 분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기도 훈련이란 끊임없이 우리 존재의 실상으로 돌아가 그것을 내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뿌리는 내 영적 정체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첫사랑으로 돌아가야 하며, 꾸준히 그 핵심 정체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기도란 순종의 마음으로 듣는 것,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이라고 자주 말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음성을 순종의 마음으로 들으신다. 그분은 아버지의 인정의 말씀을 계속 들으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당신에게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감정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기도는 훈련이다. 훈련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에 울타리를 두른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을 만큼 우리의 시간과 장소가 다른 것들로 꽉 차 있어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 않든 만족이 있든 없든,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다”라고 말하려면 그만큼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함께 고독의 자리로 돌아가서 당신의 참 정체를 주장해야 한다.
- 56p
C. S. 루이스의 『개인기도』
기도는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네. 또한 기도는 객체를 대하는 주체로서의 내 피조물적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아니야. 기도의 목표는 그보다 훨씬 소박하지. 그 상황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일깨우는 데 있네. 그것이 가능하다면,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네. 내 앞의 상황 자체에서 매 순간 하나님의 현현(顯現)이 일어날 수 있거든. 지금 이곳이 떨기나무가 불타는 거룩한 땅이네. 물론 이러한 시도는 크고 작게 성공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실패할 수도 있네. 모든 기도에 앞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는 이것일세. “실제의 제가 기도하게 하소서. 제가 실제 당신께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는 무수히 다양한 수준에서 기도하네. 감정의 강렬함은 영적 깊이를 말해 주는 증거가 아닐세. 겁에 질려 기도하면 물론 진심으로 기도하겠지. 하지만 그건 두려움이 진짜라는 걸 말해 줄 뿐이네. 하나님만이 우리의 심연 속까지 두레박을 내려 주실 수 있네. 그리고 우리도 한편으로는 우상 파괴자로 끊임없이 일해야 하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만들어 내는 모든 개념을 하나님이 은혜로서 깨뜨려 주셔야 하지. 기도의 가장 복된 결과는 기도를 마치며 이렇게 생각하는 걸 거야. “하지만 전에는 전혀 몰랐다. 꿈도 꾸지 못했다….”
- 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