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신현정 성도
하나님의 말씀을 향긋한 커피처럼 느긋하게 즐기고 싶을 때는 통독을, 아버지가 너무 좋아서 내 마음에 계속 두고 싶을 때는 암송을, 주님과 함께 호흡하며 대화하고 싶을 때는 기도를, 주님을 더 알고 싶을 때는 신앙서적을 읽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큐티! 큐티는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회사에 취직한 지 얼마 안됐을 때의 일이다. 회식이 있었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해서 손을 번쩍 들었다. 나 혼자였다. 술 못하는 사람도 먹는 분위기에서 신입이 손을 들었으니…. 냉랭한 대우를 받으며 그 시간을 꾸역꾸역 버텼다. 2차도 술집이었다. 실장님께 분위기를 깨는 게 죄송해서 먼저 가겠다고 웃으며 말씀드리고 집까지 걸어갔다.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아예 손도 안 대는 건데 믿는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앞뒤 꽉꽉 막힌 모습인 건가?’ 목 놓아 울며 온갖 생각과 혼란 속에서 걷는데 정신이 번쩍 났다. 순간적으로 큐티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이 판치는 세상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거룩하셨다. 세상 속에 계시지만 구별돼 살아가셨다. 작은 예수인 나도 세상 속에서 그들과 함께 교제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려면 나는 죽고 예수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으로 오신 분이다. 나는 말씀을 먹고 예수의 빛을 내야 하는데, 그것을 도와주는 귀한 도구가 큐티인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한 사람을 미워하다가 <날마다 솟는 샘물>을 펴고 큐티를 하면, 그 사람보다 더한 죄악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하루 종일 게을렀던 날 뒤늦게 큐티를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해 버린 못난 청지기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뎌질 때는, 주님 만났을 때 내게 주신 사명을 다시금 일깨워 주신다. 실수가 많은 내가 마음의 짐에 짓눌릴 때는, 오히려 실수를 들어 사용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신다. 이 맛을 알게 되면 큐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이 빛이 아니라 이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자”라고 고백하는 세례 요한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길 원한다.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충성하셔서 세상의 권세를 발등상 삼으신 예수님! 내 사랑하는 예수님을 닮아 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과 두터운 신뢰관계를 쌓아 가는 게 기뻐서 오늘도 나는 큐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