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탐구 박원범 목사(사랑의교회)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 자막에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엔딩 크레디트가 나온다. 대부분은 자리를 뜨지만,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혹시라도 이어질 ‘진짜 마지막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도 영화와 비슷하다. 평범하든 비범하든 모든 인생에는 반드시 마지막이 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장면에는 어떤 이름이 채워질까?
사도 요한은 유배지 밧모섬에서 하나님 나라의 엔딩 크레디트를 미리 목격한 사람이다. 그 엔딩 크레디트에는 세상의 왕들과 권력자의 이름이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요한은 ‘끝’을 봤기 때문에 ‘지금’을 이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요한이 본 ‘끝’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
요한은 시온산 위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14만 4천 명의 성도를 본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계 14:1).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소유를 상징한다. 누구에게 속했는지, 누구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영적 표식이다.
요한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표를 붙들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불렸다. 그러나 그의 노년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로부터 박해받아 밧모섬에 유배됐고, 세상으로부터 잊힌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소유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요한은 하늘의 환상을 본다. 그가 본 14만 4천은 요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하나님의 선포였다.
지금 당신의 이마에는 어떤 이름이 새겨 있는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 그분의 자녀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길 소망한다.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한 사람
요한이 본 ‘음녀 바벨론’은 크고 화려한 도시로, 그 손에는 성도들의 피가 묻어 있고 그 입은 거짓과 음행으로 가득했다(계 17:4~6).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미혹하는 모든 세속 권세와 문화를 상징한다.
요한은 그런 세상을 향해 외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 세상의 화려함과 권력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당시 이 메시지는 로마 제국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위험한 선포였다. 그러나 요한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끝을 봤기 때문에 현재에 속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세상의 화려함이 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죄와 조금씩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영적으로 깨어 세상의 거짓을 꿰뚫어 보고, 진리를 담대히 붙드는 십대가 되길 기도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사람
요한은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본다. 그곳에는 더 이상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다(계 21:4).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다(계 22:4).
요한은 고난 속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소망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을 버티게 하는 실제적인 힘이라고 전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계 22:12). 세상의 마지막 장면은 혼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승리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기록될 것이다.
요한은 유명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성경 마지막 장면에 새겨져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 나라의 진짜 ‘끝’을 본 자로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소망을 외쳤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의 삶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