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김지태 목사 (부산 영안교회)
요즘 사람들, 왜 이러는 걸까요?
얼마 전 ‘눈길 속의 분노’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사건들 중 ‘시선 처리’를 잘못해서 생기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눈길 때문에 시비가 붙고, 상대방이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흉기를 휘두르며, 나를 째려봤다며 얼굴에 화분을 던져 목숨을 빼앗아 간 사건들입니다. 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째려보기는커녕 쳐다본 적도 없다’고 호소합니다.
실제로 한 사건의 CCTV를 분석해 본 결과, 피해자는 그냥 얼굴을 옆으로 ‘돌렸을 뿐’ 전혀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째려봤다는 이유로 다툼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까? 아마도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은 가정이나 학교, 교회 등 어디서나 별것 아닌 일로 큰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화가 난다! 화가 나!
우리들은 왜 이렇게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걸까요? 도대체 왜 이렇게 쉽게 기분 나빠하고 분노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현상을 ‘앵그리 버드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앵그리 버드’란 가족을 잃어버린 새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요새 같은 적진을 머리로 부수고 적을 죽이는 스마트 폰 게임입니다. 이 게임에서 새는 항상 분노해 있습니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새처럼 항상 분노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자기에게 피해가 오거나 기분이 나쁘면 숨겨놨던 분노의 감정들이 폭발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감정들이 적절하고, 균형 있게 작용해야 우리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라는 감정을 지혜롭게 다스리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십대들
먼저는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삶의 짐을 너무 많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영어로 ‘anger’인데, 이는 근심, 괴로움, 고통을 의미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근심, 괴로움 고통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실패하지 않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책임 의식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통 무게의 물건을 나른다고 생각할 때, 옆에서 말을 걸거나 다른 것을 요청하더라도 쉽게 응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무거운 물건을 나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옆에 있거나, 말을 걸기만 해도 쉽게 짜증을 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욕 내지는 주먹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쉽게 분노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공부 스트레스, 대학 입시라는 큰 짐을 모두 자기가 지고 있고, 이것이 너무 무거운 나머지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과 화를 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분노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에 적신호가 들어 왔을 때 이것을 쉽게 해결하지 못합니다. 며칠 동안 씩씩거리며 분노의 대상에 대한 증오로 시간을 허비합니다. 심지어 몸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분노의 이유를 자신에 대한 위험 요소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험 요소를 제거하지 않는 한 감정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정의 문제는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정에 적신호가 들어 왔을 때 가장 많이 선택하는 방법이 회피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속는 것에 분노해야
놀랍게도 성경은 ‘분노’에 대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분노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먼저 분노를 ‘개인적 문제에서 공적인 문제로, 공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옮겨놔야 합니다. 즉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하나님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개인적인 문제에 분노했다면, 앞으로는 국가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옳지 않은 것들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문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과 우리의 영혼을 해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영적인 문제에 너무나 관심이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것들은 소리 없이 우리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성을 상품화한 가수들,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웹툰, 부정적인 정보를 쏟아내는 인터넷, 외모만이 최고라고 부추기는 매스컴, 자살을 미화시키는 문화, 하나님보다 돈이나 명예 등을 더 가치 있다고 속이며, 성공을 조장하는 사회 현상 등이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것들에 분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부 자기 문제에만 분노합니다. 이는 분명 사단의 계략입니다. 부디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를 짓는 어리석은 여러분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마지막으로는 진심어린 대화의 창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대는 전 세계 누구와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대화가 아닙니다.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지만, 이는 필터링이 되지 않는 일방적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갔다 왔는지, 내 기분은 어떤지, 그때그때 일어나는 모든 정보를 거르지 않고 바로 전달할 뿐입니다. 그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중심입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내가 원하지 않는 정보에 대해서는 공격적 성향을 보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요즘은 ‘만남을 통해 이뤄지는 대화’가 절실합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눠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살펴볼 수 있고, 타인을 이해 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한 분노를 품자!
청소년 여러분! 지금 분노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혹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단에게 속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품어야 할 거룩한 분노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한 지금 내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함께 나누십시오! 함께 분노할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과 대화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고 분노의 대상을 살펴보며 배려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