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이원석 작가(문화 연구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Christian)이에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죠. 그런데 여기서 ‘믿는다’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믿음의 대상에 기대는 것, 나아가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거예요.
조금 오래된 영화인데,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에 좋은 예가 나와요. 성배를 구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서 주인공은 사자머리 상에서 절벽 위로 뛰어내리라는 요구를 받아요. 뛰어내려도 죽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죠. 주인공은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외치며 뛰어내리고(원래 ‘믿음의 도약’이란 말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만든 거에요), 뛰어내린 후에야 주변 모습이 그려져 있는 다리가 놓여 있음을 알게 돼요. “네가 죽고자 하면 살리라”는 말씀에 대한 믿음인 셈이죠. 다리든 뭐든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성배를 구하러 갈 수 있는 거예요.
이를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존재를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믿음에 반대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더 쉬워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이지요? 가령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의심하잖아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못 믿는 거지요. 의심하는 대상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의심하는 대상에게 온전히 내어 맡길 수도 없고요. 즉,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기댈 수 없다는 뜻이에요.
배우고 싶다면 먼저 믿어야 한다
바른 공부에는 믿음이 필요해요. 특히 우리가 공부하는 학문과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믿어야 해요. 배움의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그 학문 분야를 존중하는 거예요.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쌓아 올린 체계와 나름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에요. 그 학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믿음의 도약이죠. 그게 배움의 출발이에요.
예를 들어 수학을 공부하려면 우선 수(數)에 대한 기본 질서를 신뢰하고 받아들여야겠지요? 여러분이 공식을 외우고 그 공식에 맞춰 문제를 푸는 것은 그것이 옳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잖아요. 만일 수의 질서를 의심하고 불신한다면, 어떻게 수학을 공부할 수 있겠어요. 위대한 고전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기에 공부할 수 있는 거예요. 그저 낡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읽고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신뢰해야 해요. 선생님을 믿을 수 없다면,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어요. 선생님을 신뢰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선생님이 삶으로 보여 주는 모습을 따라야 제대로 배울 수 있어요. 선생님을 존경할 수 없다면 그분의 가르침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 선생님과의 관계가 공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봐도 무방하죠. 여러분이 만나는 선생님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예요. 그러니 적어도 수업에 있어서는 그분들을 믿어야 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지금까지 말한 것은, 우리의 신앙과도 연결돼요.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공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에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기도 해요.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겐 한 가지 동일한 사명이 있어요. 바로 주님을 참된 선생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즉 주님을 참된 선생님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온전히 그분을 믿어야 해요.
앞에서 살펴본 ‘믿는다’의 의미로 설명하자면,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예수님의 마음과 말씀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기대야 한다는 거예요.
죄인이기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님께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을 ‘믿는’ 거예요. 즉, 흔히 말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것을 뜻해요.
이렇듯 믿음은 공부의 조건이자 구원의 전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