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교육연구소)
왕따와 일진 그리고 방관자
‘와이파이 셔틀’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일진들의 스마트 폰에 자신의 스마트 폰 핫스팟으로 3G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게 연결해 주는 아이들을 뜻한다. 매점에서 빵을 사다가 일진들에게 배달해 주는 아이들을 일컫는 ‘빵 셔틀’에 이은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새로운 이름이다.
학교 폭력 피해자의 특징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폭력 경험으로 인해 자기인식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결과 부정적 자아개념, 무기력,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결국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과거의 일진들은 한 학급의 소수 세력이었다. 그러나 요즘 일진들은 싸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웬만큼 잘하고 집안 형편도 괜찮은, 학급의 주도 세력들이다.
다수의 아이들이 일진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이 세력에 들지 못하는 아이들을 왕따로 취급하는 것이다. 일부 일진들의 횡포와 다수 아이들의 방관 속에서 이뤄지는 ‘왕따를 향한 학교 폭력’은 이미 그 수위를 넘었다. 학교 폭력 문제의 본질은 일진이나 왕따가 아니라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방관자’에 있는 게 아닐까?
친구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1964년 3월 13일 뉴욕, 27세의 여성 캐서린 제노비스는 집으로 가다가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35분 동안 수십 번이나 칼에 찔린 제노비스는 자신의 집 앞에서 처참하게 사망했다. 목격자가 38명이었지만 누구도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뉴욕 타임즈에 보도되자 미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제노비스 신드롬’이라 불리게 된 이 사건은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을 제공할 가능성이 더 적은 현상을 일컫는다.
이와 유사한 성경 속 이야기가 있다.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고,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 채 길에 버려졌다. 피를 많이 흘렸고 상처가 심했기 때문에 그냥 두면 죽게 될 것이다. 그 사람 곁으로 여러 사람이 지나갔다. 제사장도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다. 이 이야기는 참으로 비극적이다. 이 이야기가 비극인 이유는 강도를 만났거나 폭행을 당한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폭력에 의해 이웃이 죽어가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데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비극은 바로 오늘날,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 십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보고도 왜 방관하고 있냐?”라고 물으면 “나도 왕따를 당할까 겁이 나기 때문에” 또는 “그냥 귀찮아서”라고 답한다. 이기심과 귀차니즘으로 똘똘 뭉친 우리의 방관적 태도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친구들은 고통 속에 버려지고, 외로움 속에서 인생을 끝내려 하고 있다.
반전의 주인공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다. 예상치 않은 인물의 개입으로 이 비극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반전의 주인공은 사마리아인으로, 강도를 만나 버려졌던 사람은 이 사마리아인을 통해 죽음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무관심 속에서 죽어가던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인 것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 자기 자신도 늘 외면당하고 소외당하며 살아가야 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학교 폭력, 일진, 왕따, 자살 등 이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들에 의로운 분노를 품자! 누가 학교 폭력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 비극적 상황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십대들이 되어야 한다! 왕따 친구를 살리는 것은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다. 학교 폭력을 해결하는 것은 선생님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무장한 우리 크리스천 십대들의 개입이 위기에 빠진 학교와 친구들을 구할 것이다.
폭력과 폭력에 대해 방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드는 사단의 속임수를 거부하자. 폭력과 방관은 명백한 죄악이다. 아가페 사랑은 폭력에 대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이다. 아가페 사랑으로 왕따인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친구들과 우리의 학교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을 믿는다.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