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1. 십대, 수치심으로 갇히다
“아이가 갑자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대요. 사실 오늘은 준비물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친구들이 준비물이 있다고 이야기하니까 아이가 창피해서 교실 밖으로 나간 거죠. 그게 그럴 일인가요?”
- 교실을 뛰쳐나간 한 초등학생의 어머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셨는데 답을 잘못 말했나 봐요. 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친구들이 장난으로 놀렸대요. 그 뒤로 아이가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아이가 다시 학교에 갈까요?
- 등교를 거부하는 한 중학생의 어머니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따돌림을 당했어요. 그 후로 학교 가는 것을 거부했어요. 그래도 억지로 등을 떠밀어 가게 했죠.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이제 아예 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아요.”
- 은둔형 외톨이인 한 고등학생의 어머니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은 십대는 자신 안에 있는 ‘부끄러움’이 타인 앞에서 드러남으로 인해 ‘수치심’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을 재판하고, 있지도 않은 죄명을 붙였다. 결국 십대는 자신을 독방에 가뒀다. ‘죄수 ○○○번! 유죄!’
#2. 십대의 은밀한 저주, ‘스캄(Skam)’
십대는 자주 수치심 앞에 놓인다. 이것은 죄책감(guilty feeling)과 다르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 드러날 때, 부정적인 폭발력을 갖는다. 수치심이 드러나면 십대는 자신을 비하하며 타인을 피해 숨을 곳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신 없이 수치심으로부터 자신을 도피시킨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도망가도, 어떤 장소에 숨어도 수치심은 기어이 자신을 따라와 괴롭힌다.
수치심은 끊임없이 십대를 자극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와 반복적으로 자신에게 손가락질한다. 십대는 부끄럽고 도망가고 싶은 장면을 떨쳐 내기 위해 달리기도 하고, 숨을 멈추기도 하고, 힘을 다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도 본다. 하지만 떨쳐지지 않는다.
이 은밀한 저주인 수치심은 십대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다. 어쩌다 떠오르던 수치심은 시간이 갈수록 빈도가 높아지고, 나중에는 자존감에 치명타를 주며, 정체성마저 뒤흔들어 영혼을 무너뜨린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수치심을 ‘영혼의 늪’이라고 불렀다. 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덮는다’라는 의미인 고대 독일어 스캄(Skam)에서 유래됐다.
#3.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 앞에서 수치심을 고백하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
하나님께서 지으신 남자와 여자가 죄를 범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2:25). 하지만 죄를 지은 후, 그들은 ‘수치심’을 느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나뭇잎으로 덮어 숨겼다. 수치심은 죄의 첫 번째 부작용이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인조차 손가락질하던 한 여인을 만나셨다. 그녀는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다. 그곳에서 그녀는 메시야를 만난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때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시간대에 다니며 자신의 죄를 숨기려 했다. 죄에 마비됐던 그녀는 예수님을 직면하자,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께 자신의 수치를 고백했다. 그리고 수치심이 소멸됐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 4:29).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고백하자. 그러면 수치심은 소멸되고, 오히려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Q
참고 자료 : 『부끄럽지 않은 수치심』 제프리 피터슨 지음, 동연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