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마흔, 세상이 무서울 나이
“목사님! ○○병원 장례식장이에요. 아이들은 다 왔어요. 도대체 언제 도착하시는 거예요?”
주일 오후, 십대 아이 한 명이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병명을 알기도 전에 아이는 주님 품에 안겼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장례식장으로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었다. 아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이 자꾸만 차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20분, 30분, 1시간씩 멀어져 갔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아이의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얘들아!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너희들 편이 되고, 마지막까지 응원해 주고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나일 거야!”
아이들 앞에 설 때마다 외쳤던 말들이 거짓말이 됐다. 나는 그저 ‘실패자’였다. 아이의 영정 사진이 없다며 아이 부모님이 전화를 하셨다. 사진을 찾기 위해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아이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나는 아이의 죽음 앞에 설 자신도, 이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겁이 나서 그냥 도망갔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하며 세상의 이치를 알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이제 겨우 마흔 살에 어떻게 이 거대한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을까? 40년 동안 세상을 산 만큼 겁만 많아진 나이 마흔의 어른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이 참 무섭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무서웠을까?
2018년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1997년 IMF 외환 위기 상황을 맞은 아버지들의 실패와 재기를 다룬다. 그해 1월 23일 한보철강(현 현대제철)의 부도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한보건설, 삼미그룹, 진로그룹 등의 연쇄 부도를 일으켰고, 결국에는 ‘국가부도의 날’로 불리는 1997년 11월 21일,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아버지들은 구조 조정이라는 명목하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들 중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당시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을 ‘실패자’라고 여겼으며, 인정할 수 없는 실패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다.
발달 심리학자인 에릭슨은 사회적 발달 단계 이론에서 지금 아버지들이 이루고 성취해야 할 요소를 ‘생산성’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40~60세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생산성’ 다시 말해서 ‘성공’이 중요한 나이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성공’은 단순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아버지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성공을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시대다. 성공이 삶의 의미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가족에게 필요하지 않은 아빠가 될까 봐 무섭다. 자녀들이 아빠를 창피하게 생각할까 봐 두렵다.
그 무서움을 이기려고 목청껏 소리친다. 가족들 앞에서만큼은 자신의 두려움을 들키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그랬고, 지금의 아버지들도 실패하는 것이 무섭다.
어른들도 용감하고 싶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빈소를 지키는 이들은 어른이 아니라 이제 15살밖에 안 된 친구 상주들이었다. 이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친구의 죽음 앞에 상주로서 의리를 지키려는 십대들의 용기가 전염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무모한 용기가 내 용기가 됐고, 그 용기로 아이와의 약속을 하나씩 지킬 수 있었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모두가 안치실을 떠났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홀로 남아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입 밖으로 읊조렸다.
“얘야! 내가 너를 마지막까지 지킨다고 했지. 약속 지켰다!”
마지막까지 참고 참았던 눈물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른들은 살면 살수록 이 세상이 참 무섭다. 그래서 십대들의 용기가 부럽다. 가끔은 그들의 등 뒤로 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