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금동훈 목사 (사랑의교회)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1988년 올림픽이 열렸던 해에 발매된 노래가 있다.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노래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마음을 몰라준다는 서운한 감정이 가득 담긴 노래다.
그때 대한민국은 88올림픽과 함께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국제적 인지도가 본격적으로 높아지는 시기였다. 당시 눈부시게 발전하는 한국의 아빠들은 너무나도 바빴다. 아이들을 양육한다거나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30여 년이 흘렀고, 당시 어린이와 십대는 어른이 됐다. 30여 년 전보다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의 어른들은 많은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는 오늘날의 십대 앞에서 혼란스럽다.
십대는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나 때는 말이야!” 이 광고 문구를 싫어하는 것은 십대가 아니다. 어른들이다. 이 광고는 단절을 의미한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옛날이야기로 치부하고, 의미 없는 잔소리로 만들어 버린 이 문구는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상처를 준다.
십대들이 십대가 처음이듯이 어른들도 어른이 처음이다. 어른이 돼서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십대가 어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보다, 어른은 훨씬 더 여리고 연약하다.
베이비 붐 세대가 조부모가 되고, X, Y세대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출산했다. 그들의 자녀인 MZ세대와 Z세대가 십대가 됐다. 문화 리더 세대인 X, Y세대는 3차 산업혁명의 끝자락에서 개벽과 버금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이 세상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겹쳐진 세상에서 완전한 디지털을 이루고, 이진법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세상에서 새로운 신세계에 도착했다.
과거 성실과 노력, 열정이면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세상은 사라지고, 경제와 금융, 투자와 투기 사이에서 고통당하는 시대로 전환됐다. 새로운 부의 신세계가 열렸다.
세상은 과학과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바이러스를 통한 인류의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매년 새롭게 등장하는 바이러스는 국가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생활 방식까지도 바꿔 버렸다.
어른이라서 안 된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고, 인공지능(AI)과 메타버스로 이뤄져 가는 새로운 세상에서 어른이 된 X, Y세대들은 이 시대가 생소하고 두렵다. 어른이 되기는 했지만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 기분이다. 자녀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하지만 매일매일 모르는 것들이 쌓여 간다.
그리고 신체 변화에 따른 감정 변화와 노화에 대한 신체적 반응은 거북하고 인정하기 어렵다.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사랑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그런 어른들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들은 오늘도 세상이 버겁다.
옛 어른들의 지혜가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추억의 푸념으로 묻히는 세상에서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어른들은 화가 난다. 왜 항상 어른들만 이해해 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항상 모든 잘못을 어른들에게만 돌리는 현실이 억울하기도 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른들도 아프면 울고 싶고, 기쁘면 웃고 싶다. 속상하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다. 일이 안 풀릴 때면, 자신을 알아 주지 않는 회사와 사업장에서 뛰쳐나와 가족의 품에 안겨 실컷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다. 또 아들과 딸의 위로를 받으며 모든 피로를 풀고 싶다.
하지만 안 된다. 아빠라서 안 되고, 엄마라서 안 된다. 어른이라서 안 된다. 안 되는 것이 너무 많다. 누군가 어른들의 이야기 들어주면 안 되는 걸까? 내 가족이 아빠의 아픔을, 엄마의 한숨을 들어주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십대에게 금기시됐던 어른들의 속사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십대가 몰라서는 안 되는 엄마와 아빠의 마음속 이야기, 어른들이 화를 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순과 가족 뒤에 숨어 눈물을 흘리는 아빠의 고독, 가족에게 헌신함으로 무기력에 빠져 버린 엄마의 외로움을 말해 주고 싶다.
십대도 그것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십대도 가족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