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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1월

애니팡 신드롬

과월호 보기 김경덕 목사 (사랑의교회 교육연구소)

애니팡 신드롬

카톡왔숑~ 카톡왔숑~
늦은 밤, 스마트 폰에서 울리는 카톡 알림 소리.
미국으로 떠나 연락 없던 오랜 친구 이름에 반가움으로 메시지를 열어보지만...ㅜㅜ  
“[애니팡] ‘ooo’님이 당신을 초대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세요!”

 

‘딴~따 따라 따라딴~레디 고’, 이 전자 멜로디를 모른다면, 당신은 디지털 원시인! 그야말로 애니팡 열풍이다. 지난해 7월 30일 게임이 출시된 이후 한국에서 다운로드 1700만 건을 넘어섰으며, 매일 1,000만 명이 1회 이상 게임에 접속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애니팡 이용자들은 하루 평균 54분 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기한 것은 애니팡에는 거대한 스케일이 없고, 거창한 스토리나, 화려한 그래픽도 없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게임이 만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제 SNS를 기반으로 하는 시대의 완전한 도래다!


하트 줄게, 하트 줘!
헤어진 그녀에게서 온 하트를 보고 마음이 설레는 K군. 조심스럽게 답문 메시지를 보낸다.  “네가 보낸 하트 무슨 뜻이야?” 그러나 잠시 후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 “별거 아니거든? 꿈 깨!” 애니팡은 게임 플레이 1회당 하트 하나가 필요하다. 하트가 소진되면 8분을 기다리거나 친구로부터 하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소셜 요소가 이 게임의 전정한 묘미다. 그러기에 네티즌들은 온라인에서 이렇게 애절하게 외친다. “친추 하셔서 하트 좀 주셔요! 반사 하트 갑니다~~!!” 하트를 얻기 위해 하트를 무작위로 뿌리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문제되면서 소위 `하트 공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두잇서베이에서 애니팡 이용자 2,8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애니팡을 통한 카카오톡 메시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가?’에 대한 질문에 39.2%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연령별로는 10대가 31.4%로 가장 낮았으며, 40대는 48.1%로 가장 높았다.
한국인 4명 중 한 명이 매일 즐기는 이 게임은 손 안에 들고 있는 스마트한 소통의 기기를 통해 나의 ‘즐거움’을 위해 ‘관계’를 이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가진 하트가 없어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트를 얻고자 타인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기적인 소통이 아닐 수 없다.
굳이 닐 포스트만의 “매체가 내용의 본질을 규정한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심각한 것을 싫어하고 단순한 재미를 추구하는 이 시대의 흐름이 우리의 ‘관계’마저도 진정성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 지리라”(마 24:12)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즐거운 상상
십대인 우리는 세상의 법칙을 조금씩 알아가는 우리들이다. 누군가는 강하기에 더 많이 소유하고, 누군가는 약하기에 적게 소유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더 소유하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남을 누르고 경쟁하고 꼼수를 쓰는 그런 세상, 우리도 그 세상의 일부다.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은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세상의 외침을 교과서에서, 뉴스에서,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사랑이 없는 하트를 주고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나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올라, 그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십대들을 말이다.
이웃에대한 사랑 실천의 명령을 계명이 아닌 즐거움으로 여기는 세대, ‘즐거움’의 원천이 ‘사랑’인 십대들을 상상한다. 되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주고 싶은 그런 사랑, 헬라인들은 ‘아가페’라고 불렀고, 예수님은 ‘긍휼’이라 하셨으며, 우리는 ‘희생’이라 부르는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십대들을 말이다!
교실 안 폭력적인 힘의 질서 때문에 고통당하는 친구들에게, 학교가 싫지만 학교와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법칙 때문에 매일 아침 괴로운 표정으로 교복을 입어야 하는 친구들에게, 교회 생활을 함께 하고 있지만 복음도 은혜도 충만한 교제도 누리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하트를 날리고, 더 하트를 보내고 싶어 8분을 기다리지 못하는 그런 십대들을 나는 상상한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예배 시간만이 아니라, 찬양 시간만이 아니라, 언제든 어디서든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퍼 나르는 그런 십대들을 말이다. 과한 상상이라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상은 비전이 되고, 비전은 마침내 현실이 되지 않을까? Q